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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마리 토끼들의 생일(큰 토끼 이야기)


BY 섬그늘 2004-12-14

큰아이가 세상에 나오던 91년 12월에는 눈이 참 많이 내렸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초보엄마의 산전 산후 준비에 한참이던 그때는 세상이 다 내것 같이 느껴졌고 가진것이 없어도 무지 무지 행복했었다. 

 

예정일에 맟춰서 한달 일찍 직장에 사표를 냈고, 정식 엄마가 되기위한 공부에 들어갔다. 

모유를 먹이리라는 생각에 젖병준비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준비는 아주 철저하리 만큼 리스트까지 작성해가며 준비해 놓았었다. 

 

이제까지 따로 살던 시어머님이 산후조리를 당신이 해주시겠다면서 집으로 들어와서 아이를 낳으라고 하시기 전까지는 모든게 마음먹는 대로 순조로왔었다.

 

예정일 3주전이었던거 같은데... 평소에 시댁과의 관계에서 싫다소리는 세상에 없는 소리로 알고 살았던 나인지라 당연히 시키는대로 시댁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줄곳 다니던 산부인과도 옮겨가면서...

 

그날도 여늬 날과 다름없이 만삭인 몸을 이끌고 저녁을 지어 시어른을 드리고 늦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처럼 일찍 들어온 시누이가 카레가 먹고 싶으시단다. 

곧장 시어머니의 서두름은 시작이 되고, 결국 난 싫다소리 한마디도 못한 채  카레에 쓸 감자를 사기위해 두정거장이나 떨어진 동네 수퍼마켓으로 나가야 했다. 

 

12월 초였지만 그해는 눈이 참 많이 내렸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뒷골목 길, 꽁꽁 언땅에 눈발까지 흩날리기 시작하는 그 어두움을 가르며  처음으로 나는 시집살이라는게 이런거구나 느꼈었다. 

우리엄마는 십년전 올케가 만삭일때 나나 언니에게 돌아가며 밥하라고 하시고 올케 귀찮아 한다고 친구도 못오게 하셨었는데... 

결국 나는 수퍼앞 빙판에 동그라졌고 창피함에 아무말도 못하고 울음을 삼키며 집으로 돌아와 카레를 만들었다.

 

빙판에 넘어진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못한 채, 그 밤으로 난 양수가 터져서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지하기 까지 하였던 나인지라 그상황에서도 자연분만을 하겠다고 우겨대었다.

 

나올 기미도 안보이는 아이를 촉진제까지 맞아가며 억지 진통을 열시간 남짓 하였나? 

결국 딸의 아파하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시던 친정엄마의 강력한 권고에 긴급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되었다. 

정말은 아이가 태변을 먹기 일보직전에 수술한 것으로 아이의 입술은 파란색이었단다.

 

 

수술후 전신마취의 후유증은 이틀이 지나도 깨어지지 않았고 네 몸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보기는 너무 무리였다. 

당시 신생아실은 내병실의 바로 밑이였는데 계단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엘리베이터까지의 거리는 정말 멀었다. 

 

이건 정말 내가 상상하고 꿈꿔왔던 출산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한 이틀정도 입원하면 아이와 함께 퇴원하여 같이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더구나 아이가 젖을 빨지 않는 이상 모유를 먹이기는 물건너간 일이었다. 

젖병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병원에서 퇴원한 그날 시어머님께 한참 소리를 들어야 했다.  준비없음에... 

내 안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들끓었었다.  그 심부름만 아니었다면.... 

아뭏든 나는 한순간에 자격없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아이와 나는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적었다.  우유먹일 시간만 되면 식구들이 번갈아 나타나 아이를 빼았아갔고 나는 아이의 자는 모습만 볼 수 밖에 없는 나날이 보름 넘게 지속되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나는 의식한듯 안한듯 산후우울증을 격게되었고, 삶이 허무하였었다.

 

남편과 이혼까지 거들먹거려가며 나를 살리기위해 빠져나온 시집은 더이상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를 낳기전까지의 결혼3년생활동안 난 정말 시집에 잘했었다. 

아무 이유도 안달고 무조건 잘해야만 하는줄로 알았다. 

격의 없는 관계, 친딸처럼 생각해 주실것을 희망삼아 무조건의 노력을 기울였던 내 일방적인 시집 식구들과의 관계는 거기서 멈추어졌다.

 

비록 첫단추는 예상을 빗나갔지만 난 두번째 단추를 바로 끼우기위해 다시 노력하기 시작했다.

아마 아이가 이유식을 해야하는 시기가 한참 지난후 였지 싶다.

아이는 자주 울었고 행복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걸 아는듯 싶었다.

소아정신에 관한 공부를 했고 대학원에서 논문까지 썼던 내게 아이의 행복하지 않은 것 같은 나날은 정말 보기 힘든 일 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이는 무지 까다로왔고, 자주 슬퍼하였다.

나도 덩달아 슬펐고 아니 내가 먼저 슬퍼하면 아이가 따라서 슬퍼했었나 보다.

 

산후 우울증이 점점 희석될 무렵 아이와 나는 비로소 한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먼 길을 돌아서 온듯 했다. 

 

아이는 그후에도 쉽게 우는 아이로 주변의 눈총과 비웃음을 샀지만, 우리는 서로 행복했다.

내가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 후로는.....

 

아이가 만 세살이 되었을때 남편이 임파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달을 선고받고 아이들을 시댁에 맏기고 친정에서 남편만 간호하며 지내는 동안 시어머니는 아이의 가슴에 한번 더 큰 대못을 박아놓으셨다. 

 

아이는 엄마 아빠도 없이, 갑작스럽게 살게된 할머니댁에서의 생활을 적응하기 힘들었으리라!

계속 울고 짜증내는 아이에게 "네가 너무 울어서 아빠가 아프신거야." 라고 말씀하셨단다.

 

남편을 묻고 오는날 아이는 잔뜩 울먹이며 주눅든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자기가 나쁜 아이라 아빠가 아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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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가면서 큰아이는 슬프고 외로웠던 기억을 무의식에 깔고 맏이로서 강하게 보이기 위해 가끔은 과격한 행동도 하면서 속마음은 너무도 여린 자신을 감추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