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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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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살아온 날


BY 한길 2004-10-03

새로 산 휴대폰에 재미있는 메뉴가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이 일(日)로 계산되어 있었다.
2004년 10월 3일 현재, 내가 살아온 날이 14255일이나 되니 정말 많은 날을 살아왔구나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4255일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가 비누방울처럼 톡톡 터져 사라진 듯하여 아쉽기는 하지만 앞으로 또 살아갈 날은 얼마나 많은 날이 기다리고 있을까.

10대의 방황기가 생각난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미술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보낸 학창시절, 7~80년대 시골 사정들이 다 그렇듯, 그림에 소질을 보이던 내게 변변한 미술도구 하나 사줄 형편이 안된 가정형편은 나를 끝 없는 방황으로 사춘기를 보내게 만들었다. 하루하루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면서 당시에는 드문 학생신분으로 담배를 시작했고, 팔에 문신을 새기며 방황의 도는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아까운 시절을 까먹었다고 후회가 되었고, 친구들이 실력이 안되어 전문대학이라도 들어갈 때 울분을 삼키며 특기생으로 입학할 기회마저 내게는 없다는 현실의 벽에 몹시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온 짧은 날들이 왜 그리도 원망스럽고 허탈했었는지, 무모한 짓으로 부모에 대한 원망을 표현했지만, 병원에서 며칠 만에 깨어났을 때 누워 있는 내 옆에서 울고 계시는 어머니를 뵈었을 때의 죄책감이란......
10대 20대 초반의 긴 방황을 마치고 났을 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다는 사실에 삶에 대한 긴장감이 나를 다시 일으켜 새워주었다.

하루하루 소중하지 않은 날들이 있을까.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남들은 이미 자신들만의 삶의 영역을 만들어가면서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유학을 다녀오고, 결혼을 해서 지금의 아내를 맞이하고, 사업을 하고, 사업이 망해서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정말 삶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고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이런 수 많은 일들이 하루하루 내가 살아가면서 겪은 일들이라니 새삼 놀랍다.
그래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에는 정말 많은 날들이 걸렸다.

마흔이라는 나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하루의 소중함이 절실히 다가왔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 장수를 한다고 해도 딱 반을 산 셈이다.
인생의 절반을 살았으면서도 뭐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허탈감을 준다.
살아온 날들 중에 수 많은 일들을 겪은 것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얼마나 힘이 되어 줄 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아무 것도 아니게 지나칠 수 있는 휴대폰 속에 기록된 내가 살아온 날들의 숫자가 주는 의미는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조금 현실로 느껴졌다.
10년, 20년 뒤의 내 모습이 휴대폰 속에 박힌 살아온 날들보다 계산되지 않은 살아갈 날들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갖아보니 조금은 위로가 된다. 계산에는 없는 노년에 대한 걱정보다 바로바로 계산에 오른 오늘, 계산에 오를 다음날을 열심히 살아보련다.

살아온 날들의 많은 시련과 아픔이 살아갈 날들의 밑거름이 되어 준다면 내 삶에도 행복이라는 희망은 언제든지 열려 있을 것이기에 아내와 앞으로 태어날 2세와 더불어 하루를 소중하게 보듬으며 열심히 살아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