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새 하늘이 저렇게 높아졌던가?
하늘이 높아진 것만으로도 가을은 이미 문밖으로 성큼 다가온 셈이다.
8월중순에 친정집에 갔을 때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는 깊은 어둠속에서 때이른 울음을 이미 울고 있었는데, 도시의 삶 속에는 귀뚜라미는 끼질 못하네요. 차 소리에 놀라 다들 어디로 도망가 버렸는지....
가을엔 왜 하늘이 높아보일까?
봄이나 여름에 비해 공기중에 수중기가 줄어들어 하늘의 채도가 높아져서 그렇다고,
구름 한 점 없기에 그렇다고, 게다가 중국에서부터 형성된 고기압으로 인해 공기가 높이 쌓여있어서 그렇다고 선생님들은 가르쳐주셨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나긴한다.
하지만, 그렇게 답하면 너무나 삭막해서 싫다.
가을엔 왜 하늘이 높아보이지?
그건 아이들의 함성 때문에 하늘이 멀리 물러나 앉았기 때문이라고 답하련다.
가을은 아이들의 함성으로 구름이 흩어지고, 바람이 일며 놀란 하늘이 뒤로 성큼 물러나는 그런 계절이다.
어제 그 아이들의 함성을 듣고 왔다.
우리 큰아이 가을 운동회날..
요즘은 운동회라는 표현을 안 쓰나보다.
교문을 들어서니 아치형으로 세워둔 기둥을 버팀목 삼아 "ooo체육학습대회"라는 커다란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운동회'가 더 좋은데...
운동회날 학교에 가면 커다란 학교 운동장과 학교 건물은 모두 짙은 안개속에 갇혀 있었다. 희한도 하지, 안개란 놈은 우리가 운동회하는 줄 어떻게 알고 새벽부터 와서 미리 진을 치고 있는지, 그것도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서. 그런데, 우리 아이 체육학습날엔 안개가 오지 않는다. 미리 기별을 듣지 못했나?
6학년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운동장 바닥에 열심히 횟가루로 100 미터 출발선과 결승선을 그리고, 빛바랜 베이지색 천막이 여기저기 쳐지고, 하지만 그런 모든 움직임들은 짙은 안개에 숨겨져 가까이 다가가야만이 형체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신기하게도 반 별로 입장을 할때가 되면 안개는 순식간에 햇빛을 피해 도망가 버리곤 했었는데...
청군 백군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여기저기 꽃 술 든 학생들 몇명은 반 앞에 대표로 서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기반 대표선수들의 이름을 선창한다.
100 미터 달리기에서 맨먼저 달려가던 아이가 넘어지는 바람에 결국 꼴찌로 들어온다. 눈물을 손으로 훔치니 얼굴엔 땟구정물이 흐른다.
장애물달리기, 장애물을 세번 넘어 그 아래 놓여진 쪽지에 쓰인대로 실천을 해야 이길 수 있다. 아기 업은 엄마랑 같이 손잡고 뛰기, 할아버지랑 손잡고 뛰기, 모자 쓴 아저씨랑 손잡고 뛰기...대개는 많은 무리의 학부형 속에 쪽지의 인물들은 서 있었다. 학생이 다가가면 누구 찾느랴고 먼저 물어보고 누구랄 것 없이 등 떠밀면 학생은 그냥 그 사람을 이끌고 뛰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열에 하나는 끝내는 쪽지의 주인공을 찾지 못하고 마는 경우도 있었다.
찾는 학생이나 찾아주는 학부형이나 왁자지껄 두리번두리번 가슴 콩닥거리는 그런 장애물 달리기였다.
하지만,우리 큰 아이 체육학습에는 더이상 그런 땟국물 흐르는 아이도 눈에 띄지 않고, 꽃술도 보이지 않았으며, 장애물 달리기도 없었다.
학부형들이 참가할 만한 경기가 없었다. 달리기외에는...하지만, 15개월된 둘째를 데리고 간 나에게 그 달리기란 참 그림의 떡이었다. 한번쯤 어릴 때로 돌아가 뛰고 싶었는데...
100 미터 출발선에 서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내 심장이 터지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어린 나, 출발을 알리는 화약 총소리가 그 두근거림을 깨뜨려주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나갔던 나....이제 어른이 된 지금에도 출발선에 서면 그렇게 가슴이 콩닥거릴까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내가 다니던 시골 학교는 정말 운동장이 넓었는데, 그땐 내가 어려서 그렇게 커보였을까? 아님 진짜로 넓었을까?
우리 아이학교는 운동장이 너무 좁다. 학교는 넘치는 사람들로 어제 온종일 몸살을 앓아야했는데, 오늘 아침 잘 일어났는지 궁금해진다.
학생들은 반 구분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앉아있고, 앉을 자리가 없는 학부형들은 선 채로 빼곡히 테를 두르고, 보는것만으로도 지쳤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운동장도 넓었지만, 커다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공터도 넓어서 학부형들이 자리 깔고 앉아 편하게 아이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점심때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우리 아이 학교엔 그런 커다란 나무들이 없다. 어른 허리 두께의 얄상한 나무들이 즐비할뿐, 그런 나무들은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햇볕에 지친 학부형들은 건물이 만들어주는 인공적인 회색 그림자 속을 파고들지만, 한낮이 되면 그 그림자는 곧 햇볕속으로 사라져버린다.
한 엄마가 불평을 한다, 작년까지는 운동회날도 급식을 하더니 올해는 왜 점심을 싸오라고 하는거야?라며...
운동회날에도 급식을 했다구? 내겐 낯선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운동회날은 당연히 김밥을 먹어야하는거 아닌가?
급식을 한다고 했더라도 난 아마 김밥을 쌌을거다.
엄마는 김밥에 단무지랑 또 시금치랑 계란만 넣고도 맛갈스런 맛을 냈었는데, 지금의 나는 김밥속에 단무지,조미된 우엉, 시금치, 계란, 햄, 맛살을 넣고도 그런 맛갈스런 맛은 내지를 못한다.
나는 엄마가 싸준 김밥이 먹고 싶은데, 녀석은 내 김밥이 맛있다고 연방 웃음을 흘린다.
맨날 김밥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희망사항을 늘어놓기도 한다.
어머니는 손주들이 자리를 제대로 찾아올까 걱정하시는 탓에 우리 아이가 무용을 하고 있는 중간에 기어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신다, 점심 때 학교 뒷편으로 오라고...
진행요원들이 할머니 나가시라고 하는 소리에 떠밀려서도 어머니는 당당하게 천천히 걸어서 나오신다.
6학년인 큰 조카는 제대로 자리를 찾아오지만, 우리 아이 어디서 헤매는지 오질 않는다.
나랑 형님이랑 조카가 교대로 일시에 찾아나선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구석구석 두리번 거리지만 우리 아이, 눈에 띄지 않는다.
화가 날 지경에 이르러서야 한통의 전화가 온다.
어머니, 어디계세요? 지금 아이가 교실에 있거든요, 교실로 오셔요.
담임이 전화를 했다. 길이 엇갈렸나보다, 조금 전에 교실로 갔을 때 분명히 없었는데...
비로소 온 가족이 모여 김밥을 먹는다.
우리 둘째, 할머니가 사주신 풍선을 가지고 노느라 밥 먹는걸 잊어버린다.
여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적이 없으리라, 처음 학교에 들어서서는 내 등을 꼭 부여잡고 내리질 않더니 제법 익숙해지니까 그제서야 땅에 발을 디딘다. 너른 운동장을 맘껏 뛰어들어가고 나는 아이 붙잡느라고 뛰어다니고...
하루종일 피곤했으리라, 저녁 먹고는 이내 곯아 떨어진다.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6학년 여학생들이 부채춤을 춘다, 하지만 머리에 족두리가 없다.
나는 4학년때 처음 부채춤을 추었는데, 머리엔 족두리 쓰고, 한복도 연두색으로 똑같이 맞춰입고 부채춤을 추었었다. 하지만, 우리 아이 학교에는 더이상 그런 부채춤은 없다.
한복도 제각각 색동으로 입었고, 미처 흥이 나기도 전에 춤사위는 끝이나버린다.
머리가 빨간 에어로빅 선생이 나온다, 뒤이어 까만티에 청반바지를 입은 여자아이들 스무명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선다. 까만티는 허리춤에서 골뱅이처럼 또아리를 틀고 매듭이 지어져, 춤을 출때마다 흘깃흘깃 뱃살이 보인다. 최신 유행가에 맞춰 어른처럼 춤을 춘다.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나는 그 모습이 왜 그리 어설퍼 보이는지...
하긴, 하루종일 들은 음악중에 동요라고는 1학년 아이들 재롱잔치 할때 딱 한번...그 후 내내 어른들 유행가만 흘러나온다, 확성기에서는...
나 어릴 때도 그랬었나? 아니다. 나 때는 안 그랬다.
동요가 흘러나왔었는데...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나?
아이들의 함성은 예나 지금이나 하늘을 찌른다, 특히나 마지막 계주 할때는...
파란하늘을 벌써 저만치 도망을 가버렸다.
운동회에서 어린 나 대신 우리 아이를 발견한다. 최신 유행가를 동요처럼 흥얼흥얼 불러대고, 물 대신 색깔 있는 음료수를 더 좋아하고, 밥 보다는 빵을 더 좋아하는 우리 아이를...
그러고보니 운동회날 삶은 밤을 준비하지 못했구나.
우리 학교 운동장엔 바닥에 밤껍질이 밟혔는데, 우리 아이 학교 운동장엔 밤껍질이 보이질 않는다.
그런 운동회가 그립다. 여유롭게 파란 가을하늘을 볼 수 있는 운동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