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무정"을 읽고나서...
이광수는 1910년대 육당 최남선과 함꼐 조선문학계의 2인 시대를 이끈 작가다. “무정”은 이광수의 첫 장편소설이자 한국 근대문학사의 첫 장편소설로도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학교 다닐 때 국어시간에 늘 달달달 외웠던 것이 그리고 시험문제에 자주 출제되었던 것이 바로 이광수의 “무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소설은?
그러면 답은 “이광수의 무정”이었으니까…
그래서 무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작가 이광수에 대한 머릿글을 보니, 이광수는 1892년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다고 한다. 일본에서 중학과정을 마치고 와세다대학을 졸업했고, 귀국후에는 경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한다.
그는 꾸준하게 문학활동을 했으며 그의 작품에는 계몽주의가 민족주의가 잘 나타났다고한다..
6.25전쟁때 북에 납치되어 생사불명이 되었던 탓에 한동안 춘원 이광수의 소설은 생사불명 작가가 낳은 작품은 인정할 수 없다하여 냉대를 받기도 했다한다.
하지만, 모든 먹구름은 빛을 숨기고 있는것처럼, 빛은 어떻게든 삐져 나오기 마련이다. 춘원 이광수의 작품은 그 먹구름 뒤에 숨겨진 빛과 같았으리라…그러니 지금의 나역시 춘원이 20대 중반에 연재한 “무정”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겠지..
현대소설을 읽다가 무정을 접하니 문체가 낯설어 처음엔 적응이 잘 되질 않았다. 예를들면 ‘하세요”를 “합시오”라고 말하고, “드세요”를 “듭시오”라고 하는 식이다. ㅎㅎ 모든 풍경과 하는 말이 낯설다.
이 소설이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을 때 온 조선천지가 들끓었다고한다.
혹자는 갈채를 보내고 혹자는 소설 연재를 중지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하면서 어쨌든지 소설은 온 국민에게 회자되었다고 한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던 이형식을 박진사는 자식처럼 거두어 보살피고 가르친다. 박진사에게는 영채라는 어린 딸이 있으니, 일찍이 진사는 영채에게 이형식을 지아비로 삼아 덕을 다하라 다짐한다. 선각자로 깨어 교육에 눈 뜬 박진사는 학교를 세워 장정들을 모집하여 가르친다. 가난한 백성, 가난한 조선이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돈으로 학교를 운영한다는건 곧 파산을 의미했다. 가세는 기울고 보다못한 수제자는 지방 유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다가 결국 도둑신세가 되고 만다. 더불어 공모했다는 누명을 쓰고 박진사와 두 아들마저도 감옥으로 잡혀간다. 어린 영채는 외가댁을 떠돌다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온갖 구박을 감내하다가 결국 아버지와 오라비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집을 나온다. 평양 감옥에 갇혀있는 아버지를 면회하고 나서 아비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자기를 팔아 그 돈으로 보석신청하고자 하나 그돈은 이미 주인이 가지고 달아난 뒤였다. 몸은 기생일지언정 아버지가 정해준 정혼자 이형식을 지아비로 생각하매 7-8년간 정절을 지킨다.
한편 이형식은 동경유학을 마치고 경성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며 미국 유학을 앞둔 김장로의 딸 선형에게 과외로 영어를 가르친다. 여자를 처음 만나는지라 그러면서 차차로 선형에 대한 연정이 싹트게 된다. 그러던 중 잊고 있었던 박영채가 형식을 찾아와 그간의 일을 눈물로 이야기한다. 같이 눈물 흘릴지언정 영채가 이미 기생되어 몸을 더럽힌 줄 홀로 짐작하고 고민할제 영채는 배학감의 술수로 강제로 겁탈을 당하고 만다. 영채는 더러운 목숨 끊겠다고 편지 한장 남기고 평양으로 떠났고, 형식도 곧 따라나서려한다. 그때에 김장로가 형식에게 선형과 결혼하여 같이 미국유학을 가라고하자 형식은 곧 영채를 잊고 선형과 약혼을 한다.
자살하러 가던 영채는 평양행 기차에서 동경 유학생 김병욱을 만난다. 김병욱의 신사상에 의한 설득으로 영채는 자살을 접고 새 삶을 시작하고자한다.
미국유학길에 오른 형식, 선형 일행은 또한 새 삶을 찾고자 동경유학길에 오른 병욱,영채 일행과 한 기차를 타게된다. 형식은 영채와 선형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되고, 영채도 형식과 새로운 삶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되고, 선형 역시 형식과 영채사이에서 갈등을 겪게된다. 하지만,도중에 큰 홍수를 만나 산 기슭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되는대로 비를 맞고 있는 난민들을 보매 그들 모두는 합심하여 그들을 돕고 음악회를 연다. 자선 음악회에서 모금된 돈으로 난민돕기에 선뜻 기증을 하고, 이후 네 사람들은 조선을 위해, 가난한 백성을 일으키는 길은 오로지 교육밖에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서로 힘껏 노력하기로 결심을 한다.
이 소설에도 역시 춘원의 계몽주의가 잘 드러나있다.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 밖에 없다고 주인공들이 결론을 내리고 각오를 다지는 마지막 장면에선 더더욱 그렇다. 처음에 영채와 형식의 사랑으로 시작하여 각각 삼각구도로 진행되던 사랑 이야기는 이런 계몽사상을 합치는데서 자연스럽게 갈등이 해소된다. 전반과 중반이 주인공 각자의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나간데 비해 결론 부분에서는 그 후의 이야기가 너무 짧게 뭉뚱그려서 표현되었기에 좀 아쉽긴 하다. 흔히 읽었던 전래동화의 끝처럼 주인공들은 다들 잘 되었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매듭지어졌으니까. 좀더 세세하게 그후의 활동에 대해서도 서술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 소설에는 신사상으로 무장된 이우선이라는 기자도 나오고, 영채나 선형과 같이 구사상에서 신사상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겪는 여성도 나온다.
영채나 선형이 오로지 아버지의 말에 복종하여 그 자신의 감정은 상관없이 형식을 정혼자로 그리고, 약혼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여성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신교육을 받은 이형식이나 김병욱을 만나면서 이들의 구시대 생각들은 조금씩 깨어지고 그 사이에서 그들은 갈등을 겪는다. 어느게 옳은 것인지를 몰라 헤매고, 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하는지 몰라 갈등하게 되는 장면들이 곳곳에 나온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때는 늘 그렇다. 중요한 것은 아집을 지키느냐, 그것을 허물고 새집을 짓느냐일 것이다. 낡은 것은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빈 공간이 생기고, 그래야 새것이 들어와 앉을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변화할 줄 안다고 했다. 고로 변화하지 않는 자는 죽은자와도 같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그시절 10-20대의 젊은이들은 살아 있어서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나는 왜 옛날의 젊은이들은 지금 우리와 전혀 다른 인종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들 역시 사랑을 하고 때론 다투기도 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밤을 지새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지금의 우리와 똑같은데… 이런 근대소설을 읽으면 잠시잠깐 나는 딴나라 사람이 된 듯하다. 곰곰 생각하면서 머리속에 그려진 그네들이 서 있던 거리에 서 보고자 하나 뜻대로 잘 되지는 않는다.
어떠한 글이든지 그 시대상은 고스란히 글 속에 녹아 있으므로 읽고 있으면 예전 동양화가 한폭 그려지는 것에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아, 옛날에도 더웠구나…다만 선풍기 대신 부채를 사용했을 뿐…책을 읽다가 더우면 나 역시 부채를 사용해야할 것 처럼 생각되어 가끔 웃음이 나기도 했다.
먼저 배운자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살리고자 뜻을 모으는 장면은 인상 깊었다. 지금이야 어찌보면 배움이 흔한 세상이니 오로지 가르침을 주기위해 일어서는 자도 드물겠지만…우리 백성이 얼마나 무지했겠는가…무지하다는 건 곧 힘이 없다는 것이니…이것을 그냥 흘려보지 않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겠다하는 행동을 유추해내고 실천하고자 뜻을 모으는 주인공들은 과연 그시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기에 충분해보였다.
첨엔 단순한 연애소설이려니 하고 책을 폈는데 내가 느끼기에 이 소설은 계몽소설이었다.
조선의 젊은이여!!무지한 백성을 언제까지 무지라는 들판에 버려둘것인가, 먼저 배운자가 일어나 쉼없이 가르쳐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야할것이다. 이에 우리가 뜻을 모으고 같이 나가자. 혼자만 알지 말고 널리 퍼뜨려 같이 알게 하고 이로써 힘을 키워가자.
춘원은 이런 말을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었던게 아니었겠나 싶다.한편의 글이 이렇게 큰 외침을 내었으니 조선이 들끓었겠지.
글은 소리는 나지 않지만,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다양한 목소리 를 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깨우침의 소리일 것이다. 잠들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고…
나는 ‘무정’을 읽고 어떤 소리를 들었는가 되새겨본다.
‘나는 늘 변화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아집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자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나갈 것이다.
진정한 발전은 남과 더불어 동행할 때 오는 것임을 명심하고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겸손하겠다.’
다 지켜나가지는 못하더라도 글 한줄 읽을 때마다 어떤 작은 깨우침이라도
내 맘에 일어나니 나는 다만 그것을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