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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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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나를 서있게 하는 글.


BY 하나 2004-08-27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날씨가 지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니 그보다는 다람쥐 체바퀴 돌듯 반복되는 스물다섯 그해의 내 생활들이 지리했던 탓에 날씨까지도 더욱 날 후덥지근하게 한 것 같다.

 지금은 몇해를 이곳 인천에서 살아도 별로 좋은걸 모르겠다. 오히려 여러 지방색이 섞여버린 깐깐한 인심과 시끄럽게 울어대는 까치소리가 점점 서먹하게 느껴질 뿐이다. 처음엔 까치소리가 들리면 반가움에 창문을 열어젖히곤 했는데, 오염도가 높은 도시일수록 까치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조차 일상에서 멀어져버렸다.

어쨌든 시골 흙냄새를 뒤로하고 낯선도시의 향기를 좇아 차를 달린 곳이 이 곳 인천, 그 해 여름볕 뜨겁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남자들만 우글대던 집에 느닷없이 아가씨가 온다니까 아침부터 쓸고 닦고한 기색이 대문입구에서부터 엿보였다. 고기 굽는 냄새도 집안 가득하고 대문이 미처 닫혀버리기도 전에 맨발로 뛰쳐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너무나 뜻밖에어서 순간 멈칫했었다.

 빛에 반짝이는 살색 머리와 뚱뚱한 체구, 턱과 코 밑의 하얀 수염, 유난히도 굽은 허리가 애처롭기까지 한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얼굴을 자세히 볼 새도 없이 뒤이어 따른 한 여인네의 쨍쨍한 목소리...

 "아이구, 이 영감아 !!! 바지나 제대로 올리고 나가야지 !!"

그러고보니 바지가 이미 반은 내려와 허벅지 쯤에 걸린 상태였다. 파자마만 걸치고 있다가 느닷없이 아가씨가 왔다니까 미처 바지도 제대로 못 갖추고 맨발로 뛰쳐나왔으리라...

 "아가씨 앞에서 이 무슨 주책이꼬? 아이구, 아이구...."

연신 나무라는 말투로 혀를 차시며, 그래도 누가 볼 새라 얼른 끌어안고 뒤에서 바지를 끌어올리고 있는 한 여인네의 모습에 그제서야 난 얼굴이 붉어졌다.

이 두분이 바로 나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되신 분들이다.

감히 시아버지 어려운줄도 모르고 그런 첫 만남으로인해 보는순간부터 웃음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끊임없이 웃어대는 큰 손녀뻘 되는 날 보시고 같이 허허 웃으시는 통에 온 식구가 다들 웃고 말았었다.

그 웃음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데도 우리 시아버지는 말 벗도 없을 머나먼 나라로 긴 여행을 가버리셨다. 여느때처럼 살포시 잡아본 시아버지의 커다란 손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냉기로 가득차 있어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시아버지의 몸이 그만큼한 나무집에 들어가고 그 위에 흙이 뿌려지고 잔디가 뎦였음에도 난 아직도 실감이 안난다.

 이젠 명절때나 한식날 산소에 가서꽃 한다발과 음식 올리는 것으로밖엔 시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난 "만남"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ㄱ"과 'ㄱ', 'ㄴ'과 'ㄴ', 'ㅏ'와 'ㅏ'라는 글자가 각각 두개씩 짝을 이루어 이루어진 단어인지라 단어자체로도 얼마나 큰 인연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같은 자음과 모음이 두개씩 모여있는 단어는 유일무이하다. 만남이란 단어처럼 그렇게 귀한 인연으로 시아버지를 통해 새로운 만남의 기쁨을 만끽했는데, 너무 연로하신 연유로 맘껏 응석조차 부려보지 못한게 마음에 사무친다. 내 가까운 사람이 어느날부터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죽음과의 갑작스런 만남이 내겐 너무도 큰 공허로 남아있다. 아직도 퇴근할 때면 골목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계시다 가 함박웃음을 웃으며 내 손 잡고 집에가자 하실 것만 같다. 이것이 다만 꿈에서나 가능할 뿐이라니, 아직은 어색하기만한 새로운 그리움과의 만남이 그저 서글프게 다가올 따름이다.

 아버님!! 저예요, 막내며느리...기억하시죠?

얼마전에 초등학교 예비소집일에 정찬이 데리고 다녀왔어요. 제가 올해 학부형이 되거든요. 정찬이가 여덟살이 되었죠.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아버님 그렇게 저희곁을 떠나신지가...아마 아버님이 정찬이 보시면 깜짝 놀라실거예요. 물론 아주 기분좋은 탄성이겠지만요...

너무 어려서 할아버지 품에 제대로 안겨보지 못하고 커버린 정찬이를 보면서 지금쯤 아버님이 같이 계셨다면 녀석이 얼마나 응석을 부렸을가 하는 마음에 아쉬움이 커져만 갑니다. 요새 8개월된 동생 때문에 녀석이 좀 외로와하거든요. ㅎㅎ

어느날 밤  아버님 제 꿈속에 나타나서 말없이 그저 웃고만 가셔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얼마후 둘째 가진걸 알았어요. 아버님 그때 축하해주러 오셨던거죠?

그 녀석이 벌써 8개월이 되었어요. 요즘은 방바닥 기어다니느라 정신 없어요. 이름은 정재예요.  올 한식에 산소갈 때 데리고 갈께요.

아버님...여러모로 미흡하고 부족한거 많은 막내며느리지만, 그저 내 식구들 아끼고 사랑하면서 열심히 살께요. 지켜봐주세요.

2004년 2월 16일 막내며느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