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시집 온 새 새댁이 한 집에 사는 시삼촌에게 두 눈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할말 다한다.
개개인의 개성이 다르니 서로에게 간섭하지 말고 신경을 끊으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 봐 주기 싫으면 나가 살라고 그런다.
명절엔 서로 자기 집에 가서 명절을 지내야 된다고 남편에게 엄포를 놓는다.
한 가족으로서 배려하고 이해하는 구석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가족의 의미, 가정의 소중함을 우습게 아는 장면이 여과 없이 방영된 어느 주말 드라마의 일부분이다.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가벼이 보고 헐겁게 본 결혼생활이 결국엔 이혼으로 이어 졌으나 홈드라마가 다 그러하듯이 종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될 것 같은 복선을 깔고 있다.
그 드라마를 처음부터 봐온 나는 이 대목만 나오면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보게 되었다.
일부 시청자들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민감하고도 아찔한 대사가 주말이면 가정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볼 때마다 혓바닥이 갈라지도록 혀를 차지만 아무리 각본에 씌어진 대사라도 정도가 지나치다고 느낀 건 내 나이를 먹은 사람들만이 느낀 이질감 같아 내색하기도 쉽지 않았다.
자기표현 자기주장 확실하게 한다고 박수치며 반긴 젊은 세대들의 댓글을 보며 모골이 송연 해 옴을 느꼈다.
새파랗게 날을 세우며 어른에게 대드는 장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이다.
그런 그들을 머지않아 내 집 식구로 맞아들여야 하는 우리들의 앞날에 겁이 났다.
‘저런 며느리 보게 될까 겁이 난다.’
친구들과 여담을 나누며 한결같이 던진 우려 속에서도 내 며느리는 저러진 않을 것이라는 불투명한 기대를 하는 속내도 그리 마음 놓을 처지가 아니다.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배우자를 찾을 나이가 되어감에 따라 한낱 남의 얘기, 꾸며낸 이야기에도 촉각이 곤두선다.
없는 얘기도 아니고 있을 수 있는 얘기를 각색해서 드라마 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한쪽으로 접어두고 보기엔 숨통이 막힐 만큼 너무 리얼하다.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관망보다는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분노가 더 크다. 너무 엄해서 독이 된 동기보다는 비뚤어진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 내 보수적인 사고가 어쩌면 형평성에 어긋 날수도 있겠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대목이다.
아직은 혼기가 차지 않은 아들 녀석이지만 그 드라마와 자꾸 연결을 시키게 된다.
저런 며느리를 맞아 들였다면 과연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고 온전하게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지 스스로에게 화두를 던져 놓지만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
비록 답이 있다고 해도 내 답과 그들의 답은 간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해답은 될 수가 없을 것 같다.
온실 속에서 화초같이 자란 요즘 아이들은 인내에 약하고 아량과 배려에 인색하다.
뿐만 아니라 도리와 윤리 그리고 노릇의 중요성을 모른다.
산아제한 속에서 귀하게 자란 만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위아래 모르고 자기의사 거침없이 밝히는 게 똑똑하고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이치라는 것도 주관적인 것에 무게를 둔다면 딱 부러지는 답을 얻기가 쉽지 않다.
명절에 서로 자기 집에 가는 문제는 기성세대들도 느끼고 있는 갈등 중에 하나다.
여자들은 명절만 되면 며느리 신분보다도 딸의 신분을 더 강도 높게 주장하고 싶어 한 나머지 딸은 곧 며느리라는 등식을 거부한다.
돌파구 없는 악순환의 연속이지만 이해와 배려 없이는 해결 안 되는 괴리다.
명절에 시누이도 친정을 오는데 나도 친정 가는 게 맞지 않느냐고 반문이라도 한다면 조리 있고 이치에 맞게 들려줄 얘기가 많다.
그러나 가정의 틀이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유지되는지에 대한 충분한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그들이라면 이해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자란 그들이 기성세대가 되어서 아랫대를 거느렸을 때 불거져 나올 부작용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우리 어머니 세대 그리고 우리세대만 하더라도 ‘법’과 ‘도리’ 는 운명처럼 지켜왔다.
나를 위한 것보다도 가족과 가정을 소중히 여긴 책임감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많이 배우지 못해 무지했지만 머리로 익힌 지식 보다는 가슴으로 성숙시킨 현명함이 가정을 지탱시켜 준 원동력이었다.
이혼율이 높은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 보니 첫 번째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높은 학력이 주 원인이었고 두 번째는 핵가족이 빚어낸 부작용 탓이다.
머릿속이 비좁도록 차지한 지식으로 인해 지혜가 들어 갈 틈은 이미 남아 있질 않았다.
사랑과 도리를 가르쳐 줘야 할 조부모는 아예 가족 구성원에도 끼지 못했고 핵가족의 구심점인 부모는 왕성한 사회활동으로 모두 바쁘다.
가족끼리 얼굴 맞대는 일은 나날이 줄어들고 개인플레이로 인한 불신과 갈등만이 촉을 틔운다.
돈만 있으면 인성교육도 저절로 되는 줄 알고 있다.
물론 백 프로가 아닌 일부분의 얘기지만 소수가 다수를 잠식하는 사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유추 해 낸 결론이다.
내 어렸을 때 얘기는 사족이 될 수 있는 묵은 얘기지만 요즘 발생하는 숱한 사건들과 접목시키다 보니 상기되지 않을 수가 없다.
조부모를 모신 대가족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심성이 곱다.
여러 형제들이 한 이불 속에서 바글거리며 가난하게 살았어도 따스한 정이 있었다.
나누어 줄줄 아는 인정을 알았고 불편하고 힘들어도 참아내는 인내심도 배웠다. 양보와 사랑도 부대끼며 사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터득 할 수 있었다.
어른을 공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어른들이 드리워 준 그늘이 있었기에 몸에 배어 들었다.
좋은 며느리를 들이고 싶으면 내 딸 교육을 잘 시켜야 할 것이고 훌륭한 사위 보고 싶으면 내 아들 역시 그렇게 키워서 짝을 지워 줘야 하는 것은 우리 기성세대들의 몫이다.
내 교육은 소홀히 해 놓고 다른 사람 교육 탓하는 어리석음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도 귓불에 솜털 보송 거리는 아들 녀석에게 한결같이 넌지시 건네는 말이 있다.
“내 며느리 감은 여러 형제들 틈에서 자랐거나 조부모 밑에서 사랑 받으며 길러 진 사람이면 참 좋겠다. 많이 배워서 목이 뻣뻣한 사람보다는 많이 못 배워도 도리를 알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그런 결 고운 사람하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겉으로 보기엔 제일 무난한 욕심 같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거의 희귀종에 가까운 까다로운 조건이다.
그러자 아들 녀석이 심드렁하게 받아 들였다.
“엄마, 그런 사람은 아마 박물관에 가도 없을 걸요. 저 장가가기는 애초에 글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