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엔가 있음’. 내 가계부 지출목록에 한 가지 더 늘어난 항목이다.
25년 동안 써온 가계부를 매일 기록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지출한 것도 기억이 가물거려서 잔액을 계산하면 항상 구멍이 생기기 일쑤였다.
매일 생긴 구멍이 한달을 채우니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찾아 낼 방법이 없었기에 누가 볼 새라 어물쩍 넘겨버리곤 했다.
누가 감사 할 것도 아니건만 머리를 싸매고 굴려서 기어이 액수를 맞추어 놓아야 머릿속에 찌꺼기가 남지 않는 고약한 성격이 항상 나를 괴롭혔다.
물가가 하늘 꼭대기까지 솟지 않았을 땐 십 원짜리까지 계산에 넣었지만 이젠 버려도 주워가지 않는 단위에 연연해서 머리 쓸려니 아무래도 내가 한참이나 모자라는 축인 것 같아서 어느 날부터인가 뒷 단위는 사사오입을 적용해서 슬그머니 떼어 버렸다. 머지않아 백 원 단위까지 버려야 하는 화폐개혁을 해야 할 것 같다.
될 수 있으면 구체적으로 쓰려고 했지만 아귀가 맞지 않는 계산으로 머리가 아프면 최종적으로 갖다 붙인 지출목록은 ‘ 모름’이었다.
처음엔 찝찝했지만 나름대로는 편리했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무조건 ‘모름’이다. 만약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횡령할 수 있는 항목이다. 청문회에서도 모른다고 하면 어물쩍 넘어 가는걸 보았다. 모른다는데..............
내가 나를 감사해서 슬쩍 눈감아주고 고개 주억거려주면 그만이다. 꼬치꼬치 파고 물을 사람도 없고 빈다고 채워 넣으라고 으름장 놓을 사람도 없다.
식탁위에 가계부를 큰대자로 펼쳐 놓아도 눈길한번 쏟지 않는 남편의 무심은 무심이 아니라 숫제 무관심에 가깝다.
일기도 씌여 있고 자기를 씹은 부분도 심심찮게 있건만 기회를 줘도 못 먹는다.
비밀스러운 얘기 - 즉, 첫사랑 얘기나 시월의 마지막 밤 끄트머리에서 속 몸살 앓은 얘기 등등 - 도 몽땅 알몸을 드러내었지만 먹고 죽을 눈치조차도 없다.
그러나 아주 경계를 풀고 느긋하게 있는 건 아니다. 될 수 있음 깊숙이 감추어두고 낮에는 지출을 쓰고 밤에는 일기를 쓴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내 머릿속 가슴속까진 다 내 비쳐주진 않으니까.
혹자는 그랬다. 남편은 아내에게 비밀이 없어도 아내는 남편에게 비밀이 있다.......고. 그만큼 남자는 무르고 무감각인 반면에 여자는 앙큼스럽고 영악 하다는 소리다.
그래서 곰하고 여우는 최고의 궁합이라고 하나보다.
몇 년 전 일이다. 여름의 무덥고 두껍던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새살이 돋는 가을 냄새가 좋아서 그 전 가을에 입던 자켓을 꺼내 입었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빳빳한 지폐가 손끝에 달려 나왔다. 거금 3만5천원이다. 기억이 없다. 분명 세탁을 해서 보관했을텐데 이 큰 돈이 왜 이 주머니에서 사계절을 보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이만한 액수면 머리꼭지가 뽑히도록 머리를 앓다가 끝내는 ‘’모름‘이라고 썼음이 분명했다. 그동안 ’모름‘이라고 이름 붙여진 항목도 수없이 많고 그 액수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렇게 한 켠에 숨어 있으니 둔한 내 머리가 어찌 찾아내겠는가.
공돈이 생긴 것 보다 더 반가웠다. 돌아가신 조상님이 살아 오신들 이렇게 반겼을까. 반가운 맘도 들었지만 일종의 즐거운 배신감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돈 쓰는 습관이 차츰 노출이 되는 것 같다.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으면 지갑에 넣지 않고 입고 있는 자켓이나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기 일쑤였다. 일일이 지갑을 열자니 귀찮고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잔돈을 무시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곤 가계부에 구멍을 내고 머리를 앓았다.
입고 나갔던 옷을 살펴보고 뒤져보면 될 것을 그곳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 아둔한 머리로 수 십 년 동안 가계부를 써 온 게 신기하기만 하다.
그날 이후 가계부에 구멍이 생기면 ‘어디엔가 있음’이라고 적어 놓았다.
재발견의 재미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세탁해 온 남편의 옷에도 가끔씩 만 원짜리 한 장씩 접어서 넣어 놓았는데 남편은 일언반구의 감동도 표현하지 않아서 재미가 적어 그만 두었다.
아마 단순히 자기 돈이라고 가볍게 생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남편 주머니 채워 놓는 날에도 가계부에는 어김없이 ‘어디엔가 있음’ 이라고 적어 놓았다.
아둔하기는 남편이 한수 위다. 좋게 말하면 흔한 건망증이지만 귓속말로 얘기하자면 ‘둔해서’다. 십여 년 전에 세탁하라고 벗어 놓은 옷을 뒤지다가 적지 않은 수입을 잡았는데 액수가 커서 그냥 삼키기에 무리였다.
눈치를 보았지만 낌새가 없어서 고민할까봐 먼저 실토를 했더니 그때까지도 남편은 그 돈의 행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워낙 규모 없이 지출을 하는 속편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실토 한 입을 쥐어박고 싶었던 기억이다.
시계를 손목에 끼고 있었는데 헐거웠던 관계로 팔뚝까지 기어 올라간 적이 있는데 긴 옷을 입고 있어서 몰랐다. 시계 찾는다고 온 집안을 다 뒤졌다. 머리가 아프도록 찾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밤에 윗옷을 벗었더니 팔꿈치에 걸려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이없어 쳐다보는 나에게 일갈했다.
“이봐 결혼시계라고 해 주었으면 내 손목에 맞춰야지 내 손목을 시곗줄에 맞출 수 없잖아”
그래서 참새도 죽을 땐 ‘찍’ 한다고 했던가.
내 키(key)를 자기 키(자동차)라고 주머니에 넣고는 간수 소홀히 한 나를 호되게 나무란 일로 눈물을 뺐다. 자기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키를 내가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찾고 나서는 비슷하게 생겼다는 죄로 억지용서가 되긴 되었지만 그때 알아 봤다.
건망증과 둔함의 차이점을.
이날도 여지없이 남편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건만 역시 가계부를 들여다보지 않기에 일부러 코앞에 들이밀고 읽어 주기까지 했는데도 탄력이 붙질 않았다.
바깥일도 머리 아픈데 집에까지 와서 마누라 가계부 들여다보고 미주알고주알 참견하고 싶지 않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밀어 내었다.
정작 보자고 덤비면 기겁을 하고 덮어버릴 사연들이 많은데 나도 간이 참 크긴 크다.
지금도 묵어있는 남편 옷과 내 옷을 뒤져보면 알고 넣어두었거나 나도 모른 채 들어있는 돈으로 수입이 짭짭할 것 같은데 일부러 안하고 있다.
새로 꺼내 입으면 십중팔구 주머니에서 딸려 나올 돈이 분명 있을 터 그 감동과 반가움을 즐기고 싶은 생각에 가계부에 구멍이 생기더라도 모른 척 지나치고 싶다.
이젠 가계부에 구멍이 뚫려 있어도 머리 아프게 굴릴 일이 없다. 설사 잃어버리는 게 있더라도 ‘어디엔가 있음’이라고 적어 놓으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