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오래된 드라마 '아들과 딸' 이 생각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자세한 내용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딸과 아들에 대한 부모의 차별 신(scene)이 리얼하게 묘사 되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화제의 드라마였다.
왜 그렇게 인기가 높았고,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냈는지는 적어도 우리 세대 아니 그 위의 우리 어머니 세대들이 너무도 뼈아프게 겪었던 삶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풀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 여섯이나 되는 딸 틈에 유일하게 끼어 있는 금 쪽 같은 아들은 부모의 희망이었고 부모가 살아가야 할 명분이었다. 그 드라마를 보고 있으려면 아들에게 쏟는 부모의 유별난 극성엔 나도 모르게 공감을 하면서도 부글거렸던 속 삭히느라 혀끝이 아프도록 혀를 찼다. 딸들에게 퍼붓던 어머니의 독설엔 유자껍질 같은 소름이 돋았었다.
그러나 그 금쪽같고 부모의 희망이었던 아들은 부모의 욕심 언저리도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셀러리맨이 되었지만 알몸으로 쫓아 낸 딸은 소위 말하는 '사(士)'자 남편을 만나서 보란 듯이 잘 산다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드라마의 happy ending에 불과 했지만 그 드라마가 우리 사회에 던진 메세지의 핵심이 큰 반향을 일으킨 건 사실이었다.
지금은 많이 물러진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잔해가 아주 오래 되지도 않은 그때 - 10여년 전후 쯤 인가 - 만 해도 사회의 고정 된 틀 속에 머물러 있던 때라서 그런지 아버지, 아들, 남편을 따라야 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부덕(婦德)에 충실하게 따라야 했고,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눈 뜬 봉사 3년, 도합 기본적인 9년 말고도 더 이상의 세월 동안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던 우리의 딸들과 어머니들의 한을 대리만족 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강사가 주부를 상대로 강의한 내용 중에 공자를 매도한 발언을 했다.
‘내가 죽어서 공자를 만나다면 공자 수염을 다 뽑아 버릴 것이다.’
그 강사가 열을 올린 이유는 공자의 유교 사상이 여자에게 족쇄를 채웠다고 했다.
여자의 쓰임새는 오직 제사지낼 아들 낳았을 때만 유효하지만 딸만 줄줄이 낳았을 때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시키는 유교사상이야 말로 폐기 되어야 할 악습이라고 했다. 물론 주부들에게 당연히 박수갈채를 받았다.
'아들 밥은 누워서 받아먹고, 딸 밥은 서서 얻어 먹는다'라는 말은 부모가 아들과 딸에게 받는 대접부터가 극과 극을 이룬 천양지차(天壤之差)다.
부계사회가 오늘날까지 미친 영향은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화로 숱한 후유증을 유발 시킨 것도 사실이다.
시대가 서서히 모계중심으로 흐르고 있다면 섣부른 판단이라고도 하겠지만 모든 사회규범과 틀이 여성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도 이젠 부인 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반으로 확산 되어 간다.
2001년 1월 29일 정부조직법 개편에 따라 신설된 여성부는 여성들의 권익 향상과 남녀차별에 따른 불합리한 제도에 행정조치를 취할 수 있는 힘 있는 부서로 발 돋음 함으로서 달라진 시대를 대변하고 있음이다.
일일이 거론 할 수도 없을 만큼 여성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서 남자의 위상과 점차적으로 어깨 높이를 같이 하고 있는데 과연 반길만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양자 모두 참으로 할말이 많을 것 같지만 짧은 내 식견으로 토론의 여지만 남길 뿐 혹시라도 내 뜻이 왜곡되어 표류할까봐 어느 자리에서든 비교적 말을 아끼는 편이다.
시대의 흐름이 지각변동을 일으킴에 따라서 그에 따른 폐단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대처와 보완 그리고 수정도 필수적으로 병행해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두어 달을 내 집에 머물다 가신 친정 부모님을 생각하면 모시는 내내 매일 철학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편하게 대해 드리는 만큼 부모님도 편하게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엄마는 늘 죄인같이 구셨다. 말 한마디 꺼내시는 것도 무척 조심스러워 하셨고, 밥상을 받아놓고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게 너무 속이 상해서 그렇게 불편 하시면 아들집에 가시라고 가슴에 못 박히는 소리를 했다.
그럴 때 내 말을 되받아 치는 엄마의 대답은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어머니들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내가 아들 없이 너한테 와서 눈치 밥 먹고 있다면 서럽겠지만 미안하긴 해도 서럽지는 않다"
왜 그렇게 미안하냐고 서운한 맘에 따지듯이 물었더니 남의 밥이 편하게 목에 넘어가겠냐는 거다. 딸은 출가외인이기에 남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켜놓고는 아들집에서는 안방에 누워서 받아먹어도 당당 하지만, 부엌에 서서 얻어먹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게 딸집에서 취할 친정부모의 입장이라는 거다. 부모가 나서서 아들과 딸을 편 가르기 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기분이다. 아들이 있기에 서럽지 않다는, 아들의 힘, 아들의 배경이 딸집에 와서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유세였다. 아들 없이 딸집에 얹혀 있다면 나 역시 엄마에게 모진 소리 할 턱도 없고 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아들이 있는 엄마이기에 드러내 놓고 서운한 소리 아무렇지 않게 뱉는 내 의식에 바탕을 둔 내 맘도 하등 걸릴게 없다. 그러기에 든든한 아들 놔두고 딸집에 잠시 머무는 게 서러운 일은 아니라는 엄마의 해석이 어쩌면 아직도 버릴 수 없는 '三從之道'의 유물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장인 장모도 내 부모와 수평선상에 올려져서 모든 법적인 혜택을 누리는 시대에 와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진출한 많은 여성들의 입지도 높아져서 복지 혜택은 물론 전에 없이 금전적인 특혜도 받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우리네 인식이, 우리네 의식이 하루아침에 바뀌려면 무리가 있지만 시대에 맞게, 넘치지 않고 올바르게 깨어만 있다면 굳이 남자 여자 편 갈라서 힘겨루기 하면서 에너지 소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위에게 눈치 보인다는 가당찮은 오해로 인한 엄마의 곰팡이 낀 의식을 바꾸어 주려면 내 의식이 먼저 앞서서 바뀌어야 하지만 아직은 뭔가가 부족한 듯 한 쿰쿰한 냄새가 내 발목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