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나름대로 ‘갱년기 증상’이라고 진단을 내리고보니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 절대로 부인할 수도 피해 갈 수도 없는 우리나이에 치루고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고는 하지만 며칠 전부터 부쩍 심해진 불면증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남들은 수월하게 넘어 가는데 나만 유독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좀 힘들어도 별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작년 이맘 때 잠시 스치듯이 지나가서 그대로 끝이 난 줄 알았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속 시원한 처방은 없다. 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누구나 흔하게 귀동냥 할 수 있는 간단한 임시 치료법뿐이었다. 호르몬제를 복용하라, 심신을 편하게 가져라, 한방으로 다스려라, 운동을 해라.........
호르몬제(에스트론제)는 유방암을 유발 시킨다는 엥커의 한마디가 뉴스를 통해서 알려지자 너도나도 약 쓰기를 주저한다. 심신을 편하게 가지려면 가정적으로나 주변에 문제가 없을 때만 가능하다. 한방치료도 허열상충이라는 해석하에 허열을 끄는 처방이라지만 어느 것 하나도 찰과상에 머큐로크럼 바르면 낫듯이 똑 부러지는 약이 있을 턱이 없다.
최근에 드러난 증상을 모두 갱년기로 싸잡아서 진단 내리는 게 다소 억지가 따를지는 몰라도 한 두 가지 증상이 아니다. 손발도 저린 것 같고, 관절도 마디마디 아프고, 시력도 떨어지고 온몸에 균열이 생긴 듯 살갗만 스쳐도 아프다.
제일 두드러진 게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유가 더워서다.
이 엄동설한에 더워서 잠을 못 잔다면 보통 중병이 아니다. 더워도 그냥 더운 게 아니라 온몸에 땀이 바작바작 난다. 마치 반사작용으로 인한 발열현상 같이 순간순간 열이 솟는다. 이러한 증상을 한방에서는 허열증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차가운 곳을 찾아다닌다. 아파트라서 특별히 차가운 곳이 없지만 그나마 거실 문턱 가까이가 실내 온도가 가장 낮은 곳이라서 베게를 껴안고 누웠다.
잠시는 시원해서 좋았지만 몇 초 안되어서 금방 튕기듯이 일어나야 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듯이 너무 추웠다. 다시 안방으로, 그리고 다시 거실로..............
부채를 머리맡에 두고 땀이 날 때마다 흔들어 댔다. 삼복더위에나 덮을 삼베이불로 몸을 가리고 누워야 했다. 땀이 나서 온몸을 적셔 놓으면 찬물을 퍼부어야 몸이 식는 것 같다. 불면의 시간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잠을 자야겠다는 필사적인 생각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나를 편안하게 공상이나 상상을 하게끔 버려두지 않았다. 가슴 저렸던 과거의 이야기도 도달하지 않은 미래의 꿈도 심신이 편안했을 때 마음껏 공간을 휘저었지만 눈자위가 따갑도록 잠들지 못하는 형편엔 사치일 뿐이다. 생각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로 등을 맞대고 있다.
따끈한 우유를 마셔 봐도 목만 적실뿐이다. 책을 펴도 온몸에 달라붙는 끈적임으로 오히려 짜증이 나기 일쑤다. 고르게 내 쉬는 남편의 숨소리 얄밉다. 나도 저렇게 편한 잠 잔 적이 있었는지 부러웠다. 하나에서 열까지 세어 보았다. 작년에 수술대 위에서 넷을 넘기지 못하고 잠 속으로 빠져 들었던 마취약 기운이 절실해 지기까지는 백까지 세어도 말똥거리는 눈자위를 덮어버리지 못한 한계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이해를 못한다. 말로만 듣던 갱년기 증상이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것도 나를 통해서 처음 알고 보니 이해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남편의 잠을 빼앗을까봐 밤새도록 까치발로 들락거리다 보면 어느새 하늘이 허옇게 벗겨진다. 원수 같은 잠은 이때부터 쏟아진다. 남편 출근시간 놓칠새라 화면조정시간부터 시작되는 TV를 훤하게 켜 놓는다. 눈자위를 갉아대는 브라운관의 빛이 너무 강열하지만 끌 수가 없다. 자는 듯 마는 듯 부스스한 얼굴로 씽크대 앞에 서면 밤새 설친 잠으로 인해서 머리는 터질 듯이 아프고 어지럼증으로 인해서 다리에 힘이 빠진다. 남편을 출근 시키고 다시 자리에 누워본다. 수화기도 내려놓고 폰도 꺼 버렸다. 나지막하게 음악 틀어 놓고 밤새 잃었던 잠을 청하려니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고와서 진득하니 누워서 미련을 떨지 못한다. 요즘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갱년기는 노년으로 접어드는 42세부터 52세 사이에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 폐경기를 맞는 40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가장 위험한 게 우울증을 동반한 갱년기 증상이라고 한다. 이 무렵에는 자살률도 높고 정신과적인 치료를 요하는, 가족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데 본인이나 가족들 거의가 감기정도의 가벼운 병으로 치부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나처럼 신체적인 증상은 오히려 고통은 따를지 몰라도 위험수위엔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증상이 나의 경우에는 어느 날 슬며시 사라졌다가 느닷없이 찾아든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렇지만 너무 힘들게 밤을 지나고 나면 차라리 아픈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길어서 더 힘 든다. 여름밤이면 지나기가 훨씬 쉬울텐데 작년에도 겨울이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어렴풋한 시간감각으로 시계를 보면 내 예측보다 세 시간 이상은 뒤쳐져있다. 짧은 바늘이 3자에 걸려 있다. 이때부터는 그야말로 전쟁이다. 시간을 모르는 게 훨씬 나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잠들기 전의 자투리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했다. 길지도 않은 인생을 잠으로 허비하는 것 같아서 단 일분일초라도 더 아껴서 Repeat를 눌러놓은 CD박스속의 음악도 더 음미하고 낮 시간 동안 모아 두었던 생각들을 정리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의 길이는 남보다 더 늘어 날 것 같다. 이상한 계산법일지는 몰라도 덤으로 얻어낸 시간인 만큼 남들보다도 더 긴 삶을 누리고 사는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도 된 듯이 여유도 부릴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이 덤이 애물단지가 되었다. 불면으로 밤을 보내야 하는 고통을 모르고 산 무지에서 비롯된 사치의 한 중간에 이 덤이 끼어 있다.
3잘(잘 자고, 잘 먹고, 배설 잘하고)만 차질 없이 하면 만수무강은 보증수표라고 하던가. 그런데 난 한 가지를 벌써 부도내고 있으니 만수무강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드러 내 놓고 밤이 무섭다고 하면 늬앙스에 배를 잡고 웃을 일이지만 나에게는 보통 심각한 사안이 아니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겅충겅충 건너뛰는 시간이 아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