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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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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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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우선인 세상


BY 蓮堂 2006-01-03

 

 

 

  겨울방학이 되자 하나뿐인 중학교 일학년인 조카 녀석이 보고 싶어서 인천 사는 동서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만 빌려(?) 달라고 하자 놀라서 펄쩍 뛴다.
"형님, 학원에 가야 되기 때문에 안되요"
안 그래도 큰 눈을 가진 동서의 굵다란 눈이 생각나서 우스웠지만 모처럼의 내 제의를 단 칼에 무지른 앞뒤 안 잰 발 빠른 대꾸에 은근히 괘씸하고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이 사람아....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그래야 지도 코에 바람도 쏘이고 재충전 할게 아니가...좀 보내주라."
숫제 내가 사정을 해야 하는 이유는 십여 년 전에 맞벌이 하는 시동생 내외의 짐을 덜어 주고자 백일도 채 안된 핏덩이를 일년 가까이 데리고 키웠던 정리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희귀병에 걸려서 소동만 나지 않았다면 - 두 달 만에 나았지만 -  유치원 갈 때까지 키워 줄 생각을 하고 데리고 왔다가 일년도 되기 전에 보내야 했던 아린 기억이 있어서 방학 때만 기다렸는데 권한을 쥐고 있는 동서로부터 보기좋게 거절을 당한 것이다.
조카 녀석을 일년도 되기 전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되돌려 보내 놓고 오래도록 가슴앓이를 했기에 나에게 있어서는 자식이나 다를 바 없이 애틋하고 짠한 마음이 십여 년이 지나도록 옅어지질 않아서 늘 보고 싶었다.
보고 싶으면 형님이 일루 오세요라는 애교 섞인 응석에 그러면 놔두라는, 짐짓 성난 소리를 뱉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시동생에게 지원사격을 요청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권한은 동서에게 이양한 탓에 말발이 서지 않는다고 엄살을 떤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권을 포기한 시동생이 한심해서 쓴 소리를 했더니 죽어나가는 시늉을 하기에 '가문의 수치'라는 히든카드로 송곳을 들이 대었다.
결국엔 입체적인 삼자회담이 오고 갔고 며칠 빌려 드릴 테니깐 형님이 책임지고 아이 건사 잘 해 달라는 똑 부러지는 선심성 당부를 몇 번이나 하고선 중학교 일학년이면 혼자서 어디든 갈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못 미더워서 때 맞춰 올라 간 내 딸아이 편에 아이를 보내왔다.
과보호도 그런 과보호가 없지만 혼자 보내놓고 불안해서 좌불안석 못할 바에야 오히려 그게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싹은 푸르게 커서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머리부터 내려 누르는 ‘사랑’ 이라는 슬로건이 끝내는 힘없고 연약한 노란 싹으로 비칠 걸음 걷도록 만들고 있다는 걸 모르는 동서가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다고 바른 소리 하자니 씨알도 안 먹힐 견해 차이로 인해서 자칫 틈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목구멍으로 치 받혀 올라오는 소리 그대로 입속에 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쓴 소리를 약으로 삼기엔 아들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약발이 받을 것 같질 않다.
차라리 달콤한 소리로 내 잇속(?) 챙기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 무조건 ‘알았다’는 소리를 한 덕분에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기껏해야 일년에 명절 두번만 외도(?)가 허용 되었지만 '학원'에 가야 된다는 이유로 또는 공부가 뒤쳐졌다는 구실로 서둘러 가기 바쁜 아이를 내 욕심껏 잡아 둘수도 없었는데 이번의 사나흘 휴가는 파격적인 동서의 아량이고 배려였다.
아이를 껴안고 한참이나 얼굴을 부비면서 참으로 고약한 시대에 살다보니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세태가 너무 삭막하고 속상해서  끓는 속을 삭혀야 했다.
다른 아이들은 죽어라고 공부하는 시간에 큰집에서 빈둥거릴 아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못 보내겠다는 동서의 맘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숨구멍 있는 대로 다 틀어막고 어느 구멍으로 숨을 쉬야 하는지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극성에 혀를 찼다.

 

남에게 밟히지 않으려면 내 발을  더 높이 치켜 들 수밖에 없는 경쟁시대에서는 한가하게 숨쉴 여유조차도 아깝고 불안하기만 한 모든 극성 부모의 맘을 헤아려 주어야 하는 것도 이 사회의 몫으로 남아 있다.
공부만이 출세의 지름길이고 공부만이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라는 관념이 깊이 박혀있는 한 이렇게 남들과의 숨 막히는 경주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언젠가 정신과 의사인 이 시형 박사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들었는데 강의 도중에 청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박수를 받은 부분이 있었다.
<내가 고용주라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한번도 결석 안한 사람은 절대로 채용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살면서 집안에 대소사, 경조사는 있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참석안하고 죽기 살기로 공부에만 매달린 사람은 한마디로 인간미 내지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회사에 마이너스 요인이 생길 우려가 높다는 것이었다.
조부모 제사 날, 부모 생일 외우는 것보다는 수학공식 한 가지라도 더 머릿속에 넣어 두는 게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한다.
부모 이름석자는 한문으로 못 쓰더라도 영어단어 한 개라도 더 외워 쓸 수 있어서 그게 출세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면 그게 현명하다고 한다.
나무라고 트집 잡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주위를 돌아보면 공부 때문에 불거지는 부작용은 비일비재하다.
출세지향적인 사람일수록 외곬수에 가깝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나만 가지는 편협 된 생각인지는 몰라도 '공부'가 불합리를 합리로, 부적당을 적당으로, 윤리와 도덕을 무시해도  용서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모순에 오히려 내 숨통이 막혀오는 답답증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출세병과 명문대학병에 걸려있는 난치병 불치병을 치유할 묘약은 과연 개발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山에는 山蔘이고 바다에는 海蔘이라면 집에는 高蔘(高三)이라는 웃지 못 할 유행어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입시생이 있는 집에서는 큰소리를 내어서도 안 되지만 상전 받들듯이 모셔야 하고 모든 집안일에 면죄부 시켜주는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공부도 지 할  탓이라고 하지만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힘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기나 빽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최소한의 앉을자리 설 자리만은 일러주는 게 부모 몫이지만 이것 역시 자신 없는 부분이다
다른 건 못해도 다 용서 되지만 공부 못하는 건 용서가 안 된다는 어느 한심한 학부모의 얘기를 전해 듣고 이 시대를 살면서 차마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할 목불인견을 접해야 하는 불상사를 두 눈 멀쩡히 뜨고 받아 주어야 한다는 게 역겹기만 하다.

 

아들을 큰집에 내려 보내놓고도 미심쩍어서 수시로 원격조정을 하고 있는 동서가 차라리 애처로웠다.
‘자기 전에 영문일기 써 놓고, 문제집 풀고, 속옷은 매일 갈아입고 튀긴 음식은 콜레스테롤이 높으니까 먹지 말고.............큰 엄마 말씀 잘 듣고.....’
영어 공부는 군에서 4박5일 외출 나온 아들 녀석에게 책임을 지워 놓았고 국어와 수학은 딸아이가 맡아서 할당해 온 양을 채워 주어야 했다.
사나흘 와 있는 조카 녀석의 지겨워하는 표정에서 이시대의 교육의 현장을 보는 듯 했다.
자의에 의한 교육이 아닌 피동적인 교육이 얼마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맘이 놓인다는 데 할 말이 없다.

조카 녀석을 나흘간 빌린 댓가로 거금 들여 옷 한 벌 사 입혀서 올려 보냈다.
주머니에 용돈 두둑이 넣어 가지고  덩치 큰 아들 녀석 보디가드로 옆에 세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