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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


BY 蓮堂 2005-07-07

'멀미(Motion Sickness)'라는 소리만 들어도 목구멍에서 뜨뜻한 된 춤이 거품처럼 기어오른다.

 이 멀미는 동요병 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귓속에 있는 세 개의 반고리관과 수직으로 이루어져 있는 한 쌍의 耳石器(이석기)의 감각수용기관이 갑작스러운 가속에 의해서 발생을 한다고 배웠다.

 이 멀미의 대표적인 증상은 구토와 어지럼증인데 나처럼 지독한 멀미쟁이는 이 두 가지만 겪는 게 아니고 종합적이고도 복합적인 중증이었다.

 가장 심한 게 차멀미 - 이상하게 배멀미는 하지 않았다 - 였는데 시외버스만 봐도 목이 뜨끔거리면서 온몸을 기어 다니는 메스꺼움에 토악질을 해 댔다.

희한하게 난 이 이미지에 대해서는 알레르기를 일킬만큼 민감하다.

큰아이를 가졌을때 입덧이 심해서 몇달을 고생했는데 그때 입고 있던 옷을 보면 그 후에도 멀쩡한 입덧을 하는 정신적인 질환을 앓았다.

결혼할때 비싸게 주고 산 옷이지만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만큼 감각적으로 느끼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이 입덧과 멀미는 그 증세가 비슷해서 요즘도 가끔 멀미를 앓을 때면  그때의 입덧이 떠 올라 혹시라도 입고 있는 옷을 버리게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가솔린의 그 특유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면 어느샌가 내장이 꿈틀거리는 증세가 어김없이 요동을 쳤다.

 온몸의 땀구멍이 다 열리는 것 같은 나른함과 동시에 찾아오는 건 울렁거림을 동반한 복통과 두통, 그리고 목구멍 안에서는 뜨거운 거품이 이는 것 같은 부글거림이 쉬지 않고 끓어올랐다.

 진땀이 나고 뜨거운 쓴 침이 계속 목구멍과 입안을 들락거리면서 몸 속의 진기를 다 빼버렸다.

 멀미가 심할 때는 토하거나 한잠 자고 나면 거짓말처럼 개운한데 이 잠드는 과정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잠이 들려고 하다가도 울컥거림 때문에 눈이 감겨도 잠이 쉬이 들지 못하는 거였다.

 예전에는 버스를 탈려고 하면 차도 타기 전에 멀미를 앓아야 했고  타고나면 그대로 초주검이 되어서 도착지에 가서야 겨우 깨어나야 했다.

 흔히들 예방책 내지는 치유책을 펴 보이지만 나한테는 해당이 되지 않았었다.

 배를 비우면 된다고 해서 굶고 차를 탔다가 그대로 자리에 쓰러진 적도 있었고, 배가 부르면 괜찮다고 해서 배터지게 먹고 탔다가 뱃속을 몽땅 쏟아내는 구질구질 한 모습도 보였었다.

 생밤을 먹어라는 둥 귤을 먹어라는 둥 임자 없이 떠도는 민간요법도 나한테는 멕혀 들지 않아서  장거리 버스여행은 쥐약이었다.

 시내버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자주 타다보니 내성이 생겼는지 승용차와 별반 다를 게 없이 멀쩡해 졌는데 시외버스만 유독 멀미를 일으키는 이유를 모르겠다.

 언젠가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시외버스를 보았는데 순간 속을 뒤집는 메스꺼움에 할수없이 차를 세우고 다 토해야 했다.

승용차를 타도 멀미를 하는줄 알고 남편이 나보고 별스럽다고 했을때 '당신이 멀미를 알어?'라는 유행어로 무안하고 속상함을 뭉개어 버린적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남해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해서 돈까지 냈다가 멀미를 걱정하시는 아버님이 나를 안보내실 요량으로 하나밖에 없는 운동화를 물에 담가 버렸기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가서는 꼭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는데 마침 그 무렵에 경주로 수학 여행 갔던 어느 중학생들이 건널목에서 사고를 만나 45명이 사망하는 대형참사가 터지자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자체를 없애 버렸다.

 여고 2 학년 때 겨우 멀리 간 곳이 김천 직지사였는데 이 소풍도 기차로 갔기에 가능했다.

 중고등 6년동안 기차통학을 한 덕에 기차멀미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작은댁을 갈 때였다.

 택시 타고 가라는 시부모님의 당부를 어기고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갔다가 시댁 어른들이 한방 가득 앉아 계시는 앞에서 그대로 기절을 한  일은 두고두고 민망한 사건이었다.

 이 멀미는 아무래도 유전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친정 어머님이 유독  멀미를 많이 하셨고 동생들도 나 못지 않게 멀미가 심했다.

 남동생은 언젠가 버스로 외가에 가다가 할 수없이 중간에 내려서 10여 리 길을 걸어서 간 적도 있었다.

 요즘은 그래도 차를 자주 타다보니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는지 심하게 하진 않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선입견인지 괜히 배가 아픈 것 같고 속도 메스꺼운 것 같아서 준비해 둔 사탕을 입에 물어 보기도 했다.

 이젠 꾀가 생겨서 여행이라도 갈 때면 항상 카세트를  챙겼다.

 귀에다가 이어폰 꽂고 그대로 잠이 들면 희안하게도 목적지 가까운 곳에 다다르면 잠에서 깨는 신통함도 터득하게 되었다.

 음악광인 나에겐 둘도 없는 치료약이고 예방약이었다.

 

 가파르고 숨가쁜 요즘은 차를 타지 않아도 눈 먼 점쟁이 산통 흔들어대듯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멀미를 앓아야 했다.

 한 세기 전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인한 식민지 국민으로서 느껴야 했던 치욕의 멀미를 앓아야 했고  또 반세기 전에는 이데오르기가 빚어낸 동족상잔의 뼈아픈  멀미를 심하게 앓아야 했다.

 멀미는 여기서 그친 게 아니고 시대가 변하고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인륜과 천륜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도 쉬지 않고 내장을 뒤흔들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서있는 이 자리에 미진의 가느다란 멀미의 징조는 항상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TV나 신문을 보면 눈과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멀미, 현실에 대한 어지럼증과 불투명한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귓속의 평형감각이 제자리를 찾아도 윙윙거림의 그 울림은 환청같이 달라붙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