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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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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BY 蓮堂 2005-05-09

 3년째 비어 있는 그 집은 내가 시집오던 다음해에 발 부르트게 헤집고 다닌 끝에 내 발로 마련한 시골집이었다.
 대지가 140평 건평이 18평에 불과한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지만 일찍 내 집 마련했다는 자부심으로 각별한 애정을 쏟고 구석구석 손때를 남긴 집이었다.
 부엌 하나에 달랑 방 두 칸이 전부였지만 건평에 비해서 비교적 넓었던 부엌을 개조해서 방을 한 칸을 더 꾸몄고 넉넉한 봉당을 없애고 마루를 깔았다.
 큰방은 시부모님이 쓰셨는데 제일 작은 방 - 다시 꾸민 방 - 을 할머니께 드릴 때 한바탕 소동이 났었다.
 늙은이 구박한다는 얼토당토 아니 한 소리로 작은방을 거부 하셨지만 신혼살림이 적지 않았던 내가 작은방을 쓸 수가 없어서 할 수없이 할머님의 눈총 받아가며 조금 더 큰방을 써야했다.
 할머님은 아흔 한 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스스로를 '천한 뒷방 늙은이'라는 가시 박힌 소리로 우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시기도 했다.

 시냇권을 십 여 리 벗어났지만 완전한 촌락은 아니었고 안동 김씨들이 텃새를 부리던 氏族마을에 난데없이 他姓이 동네 한 가운데를 자리 잡고 앉으니 동네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우리 집으로 쏠리게 되었다.
 새파란 새댁이 시 조모님까지 모시고 층층시하에 하루종일 동동걸음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대단하고 대견하다고 입들을 모았지만 막상 그 소릴 듣는 내 생활은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 같았다.
 그 칭찬에 걸맞게 내 처신의 폭은 언제나 한결 같아야 했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는 족쇄에 불과 했기에 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편한 다리 뻗질 못했었다.
 내 아이들이 그곳에서 태어났고 세분 어른들 - 시 조모님, 시부모님 - 을 그 자리에서 보내 드려야 했던 곳이기에 그 집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거리는 아픔이 있었다.

 남편이 전근함으로서 그 집에서의 생활은 2년만에 끝났지만 어른들이 살고 계셨기에 떠나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고 살았던 집이었다.
 4년 전 시어머님이 그 집에 다시는 들어가시지 못하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셨을 때도 난 그 집을 생각했다.
 '이제 그 집을 어이하나................'
 유난히 잔병치레 많으셨던 시어머님이 그 집을 나오실 때는 다시 들어가 사실 줄 알고 미처 치워놓지 못하고 나온 살림살이와 체온이 채 식지도 않은 것 같은 시어머님의 옷을 끌어 앉고 방바닥을 뒹굴며 오열했다.
 텃밭에 심어놓은 채소들은 주인의 유고도 모른 채 싱싱하고 흐드러지게 돋아 있었고 한 달 이상을 비워둔 집안은 꿉꿉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 많은 살림을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서 정리를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던 일이 손끝을 뜨게 만들었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난 그 집을 팔지 않을 뜻을 비췄지만 남편은 어른들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파서) 팔고 싶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마땅한 사람이 있어서 그냥 살도록 해 주었는데 일년이 지나고 나니까 이사를 간다고 해서 내 보낸 뒤로는 3년 동안 계속 비어 있어서 항상 내 맘을 아프게 했다.
 친정을 가자면 그 집을 지나쳐야 했는데 집 가까이 오면 난 억지로라도 외면을 했다.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는 그 폐가에다가 눈을 박을려면 또 다른 가슴앓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편도 그 집을 보고 있지 않은걸 보니 나와 같은 맘이었나 보다.

 남편하고 같이 인적 끊긴 집을 돌아보는 심기는 착잡하고 울대가 아파옴을 느꼈다.
 그토록 애정을 쏟았던 집이건만 막상 대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들어 갈려고 했을 때 얼굴에 끼얹는 냉기에 머리끝이 곤두섬을 느꼈다.
 철 대문은 페인트칠이 벗겨져 너덜거렸고 담장도 허물어져서 마치 영화에서나 봄직한 '귀곡산장'이 연상되어서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무서웠다.
 아이들 웃음소리 어른들 마른기침소리 끊이지 않았던 어른들 방은 문짝이 떨어져서 흔적도 없었다.
 헌집에 비해서 유독 깨끗하고 반듯하던 문이었는데 동네사람 누군가가 소용이 되어 떼어 가지고 간 것 같아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주방문 밀치고 나오실 것 같은 시어머님의 잔상이 나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떨어진 씽크대 문은 그대로 바닥에서 삭아졌고 살던 사람이 챙겨가지 않았던 조미료 통에서는 개미가 우글거렸다.
 벽에는 시어머님이 남기신 낙서가  코끝을 아프게 후볐다.
 '제삿 나물 거리....고사리..모란.....'
 더 있는 것 같은데 지워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제삿날 제물 장만하시는걸 생각나신 김에 급히 메모를 하신 것 같았다.
 냉장고를 놓았던 자리엔 녹슬은 10원짜리 동전이 뒹굴고 있었고 전등도 이미 바닥에서 박살이 난 채 유리조각만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끼니때마다 주방 문 열어젖히며 온갖 푸념 다 털어놓으시던 할머님의 방은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하늘이 보였고 무너진 흙더미 위에 새로이 돋아난 잡초들이 뒷 텃밭과 경계선을 잃어버린 채 사람이 거처하던 방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근거가 없을 정도로 피폐했다.
 사람의 숨결이 끊긴지 여러 해를 거듭하던 관계로 멀쩡하던 지붕이 맨 먼저 내려앉았고 내가 거처하던 방 방구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주인 없는 집에 웬 포도 넝쿨은 그리도 싱싱하고 탐스럽게 뻗어 나가는지 아까웠다.
 몇 년째 홀로 지다가 피다가를 거듭하던 꽈리는 이제 흔적이 없다.
 담장 밑에 수북이 돋아있는 머위를 한 움큼 뜯었고 시어머님이 옮겨다 심어 놓은 취나물도 여린 부분만 잘라서 챙겼다.
 작년부터 자라온 내 키 만한 잡초들이 발끝에 걸려서 빈집의 황량함을 더해 주었다.
 팔려고 내 놓았지만 정부공시가격 조차도 무시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흥정을 붙히는 바람에 오기로 그냥 버려 두었더니 이젠 물어오는 사람조차도 없다.
 아무리 떠난 사람이지만 그동안의 정리는 그게 아니었는데  너무 야박한 동네 인심에 서운한 감정이 내내 떨어지지를 않는다.

 집안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온 남편의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다.
 내 소중했던 신혼의 추억이 있었고 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주었던 사연 많은 집이 이제는 세월에 눌리고 시대에 밀려서 한줌 흙으로 돌아가야 했다.
 새파랗게 이끼 낀 기왓장이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에 멀찍이서 쳐다보았다.
 용마루 위로 드러난 하늘 색깔은 古屋의 칙칙함과 대조를 이루며 에머럴드 빛을 뿜은 채 높이 올라가 있었다.
 바람이 요란스러이 훑고 지나갔다.
 대문이 요란한 쇳소리로 맞부딪히며 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