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쑤시면서 氣와 힘이 다 새어 나가는 것 같았다. 몇 해 동안 축적만 되어 있었지 발산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던 스트레스가 느린 걸음으로 몸뚱아리를 휘감았기 때문이다.
조깅화 끈을 졸라매었다. 야트막하게 엎드려 있는 뒷산으로 숨이 목까지 차 오르도록 뛰었다.
그러나, 어린아이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인데도 불구하고 중간에서 어이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이럴 수가, 믿기 지 않을 정도로 난 더 이상 속도나 힘을 낼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 거렸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것 같은 뻐근함이 발목을 잡았다.
내 건강에 대해서는 무턱대고 자신을 하고 살았다. 막연히 아픈데 없이 잘먹고 잘 자고 생리적인 현상에 별 이상이 안 보이는 이상 난 건강하다고 자부해 왔다.
따라서 신체년령도 또한 젊고 싱싱하다고 늘 한결같이 착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맘먹은 대로 몸이 쫓아와 주지 않는 사실 앞에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너무 안일하게 살았다는 자괴감에 나도 모르게 어지럼증을 느꼈다.
무얼 믿고 그리도 태평스럽게 온몸을 방치한 채 살았는지 새삼 나의 게으름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남들 운동할 때 내 눈에는 그들의 부지런함보다는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는 걸로 보여 졌다.
다이어트와 군살제거에 땀흘리는 그들의 눈물겨운 싸움에 혀를 찼다.
끼니를 거르거나 소식을 하는 사람을 보고 별스럽다고 구석으로 몰아 부치기도 했었다.
난 그들보다도 날씬했고 몸에 붙은 군살도 없다, 나 그들보다도 더 건강한 몽뚱아리를 가졌다,
지금껏 내 몸에 메스한 번 댄 일이 없고 입원실에 누워서 링겔 꽂은 적은 더우기 없다, 몸에 좋다는 보약 한 첩 먹은 적도 없다, 그래서 난 건강하고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머 이런 사실에 입각하다보니 자연히 건강에 대해서는 남의 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건강의 척도는 이미 어긋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신체에 실금 같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여자로서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필요한 부분이 띠엄띠엄 줄어들었다. 자리에서 일어 날려면 한번쯤 주저앉았다가 일어나야 할 만큼 힘이 들었다. 무거운 것 들어 올리려면 비명부터 터진다. 조금만 서 있어도 허리가 꺾이는 것 같이 아프다. 시력이 떨어지고 자주 드러눕는다. 기억력도 저하되고 말을 해도 조리 있게 구사하질 못한다. 말이 옆길로 새어 나간 적이 다반사였다.
노래를 불러도 음성이 갈라져 나오는 건 물론이고 고음 처리도 힘들다.
이러한 증상의 주범은 '운동부족'이었다.
그동안 내 나이를 잊은 채 소홀히 하고 남의 일로 여기며 우습게 안 것이 내 발등을 찍은 것이다
이미 봄은 이마 위에 내려 앉아있었다.
실눈 뜨고 고속도로를 기어가는 개미군단을 보았다.
아직은 저것이 차로 보이지만 머지않아 내 눈 속에 들어올 그림은 흐릿한 점선일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점선마저도 머지않아 내 시야에선 사라질지도 모른다.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를 산소 앞에 퍼 질러 앉았다. 어렸을 때에는 무덤을 겁냈었다.
무덤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하얀 연기와 동시에 소복을 입은 여인네가 산발을 한 채 튀어나온다고 생각해서 무덤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었다.
예전에 브라운관을 독차지 하다시피했던 '전설의 고향'의 대표적인 드라마의 설정이 그리했는데 그런 일이 실지로 일어나고 있다고 착실하게도 믿고 있었던 순진함에서 비롯되었다.
그 두려움은 오래 전까지만 해도 떨쳐내어지지 않게 터부시 되고 있었지만 이젠 지금 내가 퍼 질러 앉아 있는 이 자리가 결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학적인 근거가 이젠 어릴 때의 그 비과학적인 口傳을 눌러 버렸기 때문이리라.
나이 들면서 두려움도 줄어들었는지 왠만 한 일에는 그리 놀라지 않는 대담함도 늘어났다.
신체적인 리듬이 무너지면서 덤으로 얻은 건 살면서 부대끼고 어울리는 조화를 배웠고, 남이 설 자리와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꿰뚫을 수 있는 처세술도 익혔다.
생각이 많아지고 덩달아 내가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에 별로 미련을 두지도 않게 되었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般若心經에 보면은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란 귀절이 나온다.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죽어 지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결국 아무것도 없는 데서 숱한 생각이 일어난다고 했다. 하룻 동안 분별하고 인식하며 일어나는 생각의 양을 형상으로 만든다면 아마 엄청날 것이지만 생각은 아무런 형체도, 뿌리도 없으므로 그런 것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해서 얼마든지 생각을 일으키지만 그 근본은 텅 비어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는 모두 '空'이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그러다 보니 아둥바둥 헐크 같은 표정으로 눈에 핏발 세우며 사는 일에 무디어져 버렸다.
나이가 듦에 따라 의복같이 몸에 걸쳐지는 자연스러운 체념이나 포기 같기도 했다.
몸이 편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이 편하니까 몸이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요즘의 일상에 한줄기 불안감이 똬리를 튼다.
지금의 나는 참으로 평화롭고 맺힌데 없이 살고 있다.
훌쩍 커서 내 품을 떠난 아이들 무탈 하게 살고있고,
집안의 기둥인 남편은 구조조정의 회오리 속에서도 태산같이 버티면서 우리가족의 울타리 역할 무리 없이 하고 있다.
몇년동안 동동거리면서 꾸려왔던 내 일을 접고 이젠 한발 물러선 느긋함으로 세월을 낚고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차 향에 묻혀 산다.
어스럼 저녁이면 남편과 뚝방길 걸으면서 살아온 얘기와 살아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눌 때의 그 기쁨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 모두 상쇄시킬 만큼 견고했다.
부(富)는 이미 내 행복지수에서 제외된지 오래다.
옛선비들의 安貧樂道가 얄팍한 주머니를 부끄럽지 않게 은근슬쩍 채워주고 있었다.
내 한몸 눕힐 집이 있고 곳간은 아직 비어있지 않아서 쥐꼬리만한 여유만큼은 부릴수 있었다.
그러나 이 평온함의 한계점이 과연 어디일까를 생각하니 머리끝이 곤두선다.
예민해진 내 더듬이가 아니더라도 이날까지 살아온 흔적을 되짚어 보면 좋은 일에는 항상 魔가 끼어 드는 사례를 왕왕 보아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 손금을 보던 지인이 장난 삼아 일러준 말이 목에 가시같이 걸렸었다.
' 사소한 걱정에 항상 가슴앓이 할 상입니다. 맘을 너르게 먹고 대범해야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한 말이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세심한데 까지 맘을 쓰면서 전전긍긍 했던게 살면서 투명하게 드러남을 부인할수 없었다.
서양의 어느 철학가가 말했듯이 사람은 98%의 쓸데없는 걱정으로 산다고 했다.
지나간일로 걱정하고 다가오지 않은 일로 마음 졸이며 걱정을 해도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는 어리것음을 범한다고 했다.
건강을 잃으면 인생 전부를 잃는다는 말이 실감이 나서 인지는 몰라도 게으름이 빚어낸 결과로 인해서 모든게 차례로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겁내고 있다고 하면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닐까
이젠, 호수면 같이 잔잔하고 매끄러운 일상에 조그마한 흠집이라도 낼까 봐 조심 또 조심하며 살얼음 위를 딛는 맘으로 경계하고 낮추며 살고 싶다.
법구경에도 이르기를 '잘 나갈 때를 조심하라'는 경계 메세지를 이르지 않았던가.
너무 편하게 사니까 쓰잘데기 없는 생각만 한다고 탓 할 수도 있지만 약간의 긴장도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어지러운 현실에 대한 예방 차원에서 그리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