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어머님이 폐렴으로 입원 하셨다는 연락을 받은 내 발걸음은 동동거리는 소리를 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기에 내 눈과 귀는 밤낮으로 팽팽하게 당겨 있어야 했다.여든을 넘기신 아버님과 그리고 그 뒤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따라가시는 어머님의 연세도 여든을 먼 거리에 두고 계시지 않으셨다. 노환의 그 무거운 굴레가 두 어른을 위협하며 앞날에 대한 보장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옇게 흐려 놓았지만 막상 다급한 발걸음으로 뵈러 가면 항상 속은 기분이었을 때가 많았다. 옛말에도 겨울보리 좋은 것하고 노인네 근력 좋은 건 믿을게 못 된다고 했지만 부모님을 뵈면 조마조마한 가슴은 진정이 안되었다.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어머님의 얼굴은 핏기라고는 얼씬도 하지 않은 석고상 같이 창백했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숨소리는 끊길 듯이 가늘었다. 거뭇거뭇 얼룩진 검버섯은 세월의 가져다 준 부유물 이었고, 도랑물이 소리내어 흐를 것 같이 깊이 패인 주름은 긴 강줄기를 연상케 했다. 탄력을 잃어버린 눈꺼풀은 닫혀진 채로 열리지를 않았다. 간간이 달막 거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웅얼거림은 아버지를 찾는 소리 같았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엄마의 의식 속은 아버지 외에는 어느 누구도 비집고 들어갈 만큼 너르지 않았나 보다.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의 존재는 무의식중에도 엄마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를 그리는 엄마의 애절함과 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진한 아픔에 난 울음마저도 입 밖으로 토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엄마의 모습 위에 미래의 나의 모습이 자꾸만 클로즈업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나도 엄마 나이면 저런 모습으로 내 딸아이 앞에서 이런 맘 들게 할 것 같아서 눈시울이 젖어온다. 엄마에 대한 나의 애틋함마저도 내 아이가 닮아낼 수 있을지 괜한 욕심을 내어 봤고, 저런 무의식 상황에서도 난 남편을 찾을 수 있을지 고개가 갸웃거려 진다. 그러나 난 그 부분만은 엄마를 닮아낼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끔찍한 사랑은 감히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성역에 가까웠다.
두 분은 항상 틈을 두지 않고 몸이 맞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계셨다. 엄마는 아버지의 다리를 어루만지시거나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시며 눈은 아버지를 보고 계셨다. 때때론 코를 거머쥐고 장난도 치시고 살짝 꼬집기도 하셨다. 아버진 그런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고 생트집을 잡을 때도 있지만 엄마는 다 받아 주시는 것이었다. 아버진 엄마에게 팥으로 메주 쑨다고 우기면 엄마는 맞다 고 해야 했다. 두개를 세 개라고 해서 맞다 고 했더니 버럭 화를 내셨다고 한다. 눈치 없이 무조건 맞다 고 했다가 빚어낸 부작용이었는데 이게 두분 사이에 시빗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알콩달콩 노인네 사랑싸움이지만 지켜보는 자식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긴장감을 늘 가지고 있어야 했다.
엄마는 밤이 새도록 깨어나시질 않으셔서 가족들 애를 태웠다. 오빠내외의 지극한 효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는 자기의 죄 인양 안절부절 못 하는 올케를 보니 미안하고 안 스러웠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지만 변하지 않는 오빠내외의 효심엔 출가했다는 명분 하나로 버텨온 내 마늘 속껍질 같이 얄팍하고도 짧은 수발이 부끄럽기만 했다. 아침 일찍 혼수상태에서 눈을 뜬 엄마의 첫마디가 나의 화를 돋우었다.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은 엄마의 힘은 아버지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수발을 들다가 체력이 밀리어서 무너지신 줄도 모르고 여전히 아버지를 찾고 계셨다. "니...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 계시니?" 띠엄띠엄 혀끝으로 달려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염려는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내 가슴에 찬물을 쏟아 부었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걱정은 좀 접어둘 수 없수?.이젠..좀 그만해요 제발!!"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복종 그리고 답답한 순애보에 난 언제부터인가 질리고 있었다. 엄마는 울고 계셨다. "불쌍한 니 아부지.......나 없으면 안 되는데............." 엄마는 아직도 옛날의 그 패기만만하고 가족 위에 군림하시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을 담고 계신 듯 했다. 그러기에 지금의 아버지를 부정하셨다. "그 쩌렁쩌렁하던 니 아부지가 왜 저리 되셨는지..불쌍하고 한심한 양반......."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환상이 현실을 더 형편없이 매도하고 있었다. 80년의 그 세월을 인정하기엔 뭔가 억울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게 있었던 것 같다. 남들은 그 나이에 늙고 병들 수 있지만 니들 아부지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라는 그 어떤 든든한 빽이라도 있는 냥 고개를 흔드셨던 엄마였다. 평생을 아버지의 아집과 독재로 큰소리 한번 드러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온 세월에 반기라도 들 수 있으련만 한결같은 순종이 나를 화나게 했다. 이게 자식으로서 화를 내야 마땅한지 앞뒤 재어보고 싶진 않지만 우선은 화부터 나는 건 어쩌지 못하겠다. 아버지가 미운 게 아니고 엄마가 더 미운 구석이 있는 게 아이러니컬하기만 하다. 아무리 효자보다는 악처가 낫다고 했지만 이젠 한구석 접어 둘 때도 되었건만 두 분의 금슬은 세월이 쌓일수록 두께가 늘어나기만 했다. 자식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난 일부러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병실 밖으로 나왔다.
난 부모님을 뵈면 전설 속의 나무 連理枝와 전설 속의 새 比翼鳥가 생각난다. 연리지와 비익조의 전설은 모두가 부부의 사랑을 영원으로 지속시키는 애틋함이 들어있다.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칠월칠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두 사람 은밀한 약속을 하는데, 우리가 하늘에서 만나면 비익조가 되고, 이승에서 만나면 연리지 되자" '상천원작비익조 재지원위연리지(上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라고 현종과 양귀비의 간절한 사랑의 염원을 비익조와 연리지에 빗대어 노래했다. 비익조는 눈도 날개도 한쪽에만 있어 암수 좌우 일체가 되어야 날 수 있다는 신화 속의 새이고 연리지는 두 그루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만 자랄 수 있는 나무다. 부모님은 서로 맞닿아 계셔야 비로서 한 그루의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연리지였고, 한쪽씩만 가지고 계신 눈과 날개는 혼자서는 날수 없는 비익조였다. 내가 커 오면서 보아온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남다르다. 부모님은 가끔씩 다투셔서 집안 분위기를 서릿발 같이 얼려 놓았지만 밤이면 어김없이 같은 방을 쓰셨다. 어린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었다. 부모님께 꾸중이라도 듣는 날이며 난 부모님이 보기 싫어서 골방을 찾아서 숨는다든지 할머니 옆에서 잤다. 말도 하기 싫었고 될 수 있으면 눈도 맞추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심하게 다투신 다음날은 두 분이 더 살가웁게 지내시는 게 여간 생뚱 맞은 게 아니었다.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사건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드신 숟갈을 씻지도 않고 그대로 드셨고 드시다 남은 밥을 말아놓은 국조차도 남김없이 드시는 게 낯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어찌 보면 아버지는 엄마의 우상이었고 존재의 이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하루도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집을 비우신 날이 아니면 각방 쓰시는걸 본 적이 없었다. 여섯 남매가 불려온 가족들이 우글거리는 와중에도 자식들과 섞여서 잘 수도 있으련만 두 분은 용케도 구석방으로 두 분만의 자리를 마련하시었다. 내 기억에 아버님은 독재자였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휘둘리는 하인 같았다. 부부싸움이라고는 했지만 아버님의 일방적인 승리였고 엄마는 맞대응 한번 변변히 하지 못한 패자에 불과했다. 그래도 번번이 잘못 했다고 비는 건 엄마의 몫이었고 아버지는 당당 하셨다. 내 눈에 비친 부부싸움이란 무조건 남자가 이기는 싸움인줄 알았다. 아내는 남편을 이기면 안 되는 줄 알았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가끔씩 친정엘 가면 두 분이 비둘기 같이 서로 의지하고 사시는 게 참으로 보기 좋았다. 나란히 텃밭을 가꾸시고, 자전거 뒤에 엄마를 태우고 시장 나들이를 하시는 모습에서 비록 거리감이 있는 그림이지만 밀레의 '만종'을 보는 것 같았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노을이 지는 저녁 들판에서 조용히 고개 숙이며 종소리에 기도를 드리는 두 사람의 모습......... 부모님이 그려내는 그림은 한 폭의 '만종'이었다. 황혼에 두 분이 마주보고 서서 자식 위한 기도로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는 듯 했다. 곁에 두고 있었던 자식들이 하나둘 멀어져 가고 난 뒤 두 분의 사랑은 더 애틋하고 각별하셨다. 두 분은 나이 들고 병마가 찾아 듦으로서 서로 등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받침대였다.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서로 찾아 나섰고 불러도 대답 없으면 불안해하시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뜨일 때면 내 머릿속은 적당히 표현할 단어 찾느라고 쥐가 날 지경이었다. 몇 년 전에도 엄마가 쓰러져서 며칠 간 아버님 곁을 떠난 적이 있었다. 엄마를 모시고 119차에 탄 오빠에게 절규하듯 부르짖는 아버님은 울고 계셨다. "니 엄마 살려 가지고 와야한다. 안 그러면 내 앞에 올 생각 말아라" 퇴원하셔서 다시 아버님 곁으로 돌아 왔을 때 아버님의 첫마디가 잊혀지지 않았다. "살아........왔어?..........난 또 임자가 영영 안 오는 줄 알고..........." 말끝을 흐리시며 반가움에 눈물 훔치시던 아버님의 모습에서 부부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걸 느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신 아버님은 병원 간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넘어져서 무릎을 다치셨다는 말에 내 가슴은 터질 듯이 아프고 또 아팠었다.
평생을 小食하시던 아버님이 風을 맞으신 뒤에 찾아온 증세는 식탐(食貪)을 하시는 거였다. 새벽에도 콩죽을 끓이고, 고기를 구워서 입에 넣어드려야 잠잠했다. 그로 인해서 늘어난 체중 때문에 더 곤욕을 치루셔야 했다. 수발 드는 어머님이 더 힘드신 게 보기 딱해서 다이어트 차원으로 간식을 줄이라고 했지만 오빠내외의 눈을 피해서 엄마는 아버님의 간식을 다락에 숨겨놓고 드렸다고 한다. 나중에 발각이 되었을 때 나무라는 오빠에게 하던 엄마의 변명이 더 기가 막혔다. "니 아버지가 불쌍해서.........배고플 것 같아서......" 효자 아들이 불효 막심한 아들로 곤두박질 친 사건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아버지의 반쪽이셨고, 아버지는 엄마 없이 온전할 수 없는 나머지 반쪽이었다. 반쪽은 지금 병원에서 갈라진 반쪽을 그리워하고 염려하고 계시고, 또 다른 반쪽은 닫혀진 대문께로 눈길 모으며 머지 않은 날 반쪽 내밀며 온전하게 맞추어 질 날 기다리고 계신다. 언젠가는 남아있는 가지 하나로도 버텨야 하는 연리지가 되어야 하고 한쪽 눈, 한쪽 날개로도 날수 있는 비익조가 되야 하는데 두 분 중 어느 분이 부러진 나뭇가지와 꺾인 날개가 될지 남아있는 우리 자식들은 그 나머지 역할을 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뿐이다. 다만, 두 분이 영원한 연리지와 비익조가 되어서 우리를 아프게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