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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자식은 눈물이련가


BY 蓮堂 2005-02-17

 

딸아이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 가운데가 뚫려있는 듯한 찬기운을 품어야 했다.
벌써 스물다섯해를 얼기설기 보내버린 데 대한 한자락의 후회와 아픔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예정일을 보름 앞 당겨 나온 딸아이는 2.4 kg의 엄지공주 같은 몸으로 나와 마주 했을때 경이로움과 기쁨 보다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백일이 될때까지 나에게 살가운 정을 받아 보지 못했다.
맏며느리의 본분을 딸아이가 여지없이 허물어 놓았다는 터무니 없는 누명을 씌웠지만 딸아이는 에미의 구박에도 아랑곳없이 그래도 에미라고 품을 찾아 들었다.
나의 우매하고도 고지식한 답답함이 딸아이와 나의 틈새를 벌려 놓아야 했다.
다행이 시댁 어른들의 손녀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 나를 굴복 시켰고 아이 백일에 난 딸아이를 품에 안고 굵은 눈물을 쏟았었다.
'미안하다......미안하다....그리고..... 사랑한다.......사랑한다..........'

딸아이는 맑고 밝게 한치의 어긋남 없이 잘 자라  주었다.
예의 바르고 착하고 올곧게 대나무 크듯이 그렇게 내 앞에서 쑥쑥 자라 주었다.
중학교 일학년때 희귀병에 걸려서 두어달 동안 죽은듯이 누워 있었던 딸아이를 부등켜 안고 쏟았던 내 피눈물은 아이를 박대했던 핏덩이 시절의 기억 때문에 더 진한 핏빛을 띄고 있었다.
제발 살아만 다오........제발....살아만 있어다오......
그래야 내가 아이에게 진 빚을 두고두고 갚을수 있을것 같아서 미친듯이 아이에게 매달렸었다.
아이가 잘못 되면 나도 세상을 버릴 작심으로 아이 곁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이의 얼굴에 푸른색을 띄우며 드리워 졌을때 아이는 나에게 힘없이 말했다.
"엄마, 저 때문에 고생만 하시고....미안해요....정말 죄송해요"
두볼을 적시며 흘리던 아이의 눈물을 난 입술로 문지르며 통곡을 했다.
'난 어쩌라고..난, 어떻게 살라고........'
주변에 둘러섰던 입원실 보호자들이 하나 같이 눈물을 쏟아 주었었다.
아이가 두어 달 만에 오뚜기 같이 일어서서 일상으로 돌아 왔을때 난 면죄부를 받은 것 같았다.

아이는 네군데 복수지원해서 다 합격했지만 부모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가고자 했다.
아이는 영어를 전공하고 싶어했지만 우리 부부는 敎大를 가라고 일방적으로 밀어 붙혔다.
아이는 단식과 두문불출로 여러날을 버티다가 결국엔 부모에게 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지켜 보았던 아들녀석의 말이 아직도 화젯거리로 오르곤 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지만 우리부모님은 자식을 이긴 승자네요......'
누나편에서 응원을 하던 녀석이었기에 부모의 승리가 결코 탐탁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도 참으로 미안했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무래도 우리 기성세대가 한 수 위라는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먼 훗날 알게 될거라는 기대로 아이의 변화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 옛날 나도 부모님이 원하는 교대를 죽어라고 안가고 버티다가 결국엔 꿩도 구럭도 놓친 채 '고졸'학력으로 끝을 냈어야 한 걸 생각하면 참으로 뻔뻔하고 염치가 없다.
아이는 대학 들어가서도 적응을 못했는지 2학년을 마치고 덜컥 휴학계를 냈을 때 온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분명 다른 속셈 - 다른 학교 편입이나 자퇴 -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죽을힘을 다해서 말리고 설득하고 위협도 했지만 아이는 장학재단의 적지않은 장학금 마저 포기한 채 일년을 쉬었다.  
그 일년 동안 아이는 동생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야학에 나가서 야학교사 생활도 했다.
홍수를 만난 수재민을 혼자 찾아가서 며칠을 흙탕물 뒤집어 쓰며(김천) 온몸을 던졌다.
청각장애인을 위해서 수화도 배우고, 병든사람 보살피고자 호스피스 교육도 받으러 다녔다.
아이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르고 매일 한 베낭씩 등에 지고 집을 나가서는 며칠씩 연락도 없이 지냈다.
음성 꽃동네로, 고아원으로 양로원으로 미친듯이 헤집고 다녀도 우린 말리지 않았고,
이 시기가 아니면 해 볼 수 없을지도 모를 뜻깊은 행적에 부레이크도 걸지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올 날만 기다리며 재촉도 하지 않았고 타박도 하지 않았다.

그 딸아이가 학사모를 쓰고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아빠에게 학사모 씌워주며 눈가에 맺히던 눈물을 보고 난 돌아서서 울음을 삼켰다.
나를 쳐다보는 눈속엔 25년 동안의 필름이 압축된 채 돌아가고 있었다.
딸아이는 항상 부모에게 죄인처럼 굴었다.
아파서 속 썩였고,잠시나마 부모 뜻을 거슬린게 맘에 걸렸고,휴학해서 가슴 아프게 했던 게 두고두고 빚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일년전에 썼어야 하는 그 학사모였지만 제자리로 돌아와서 당당하게 한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 부족함 없이 어깨높이 맞추어 주는 것 만으로도 난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했다.
며칠 있으면 노란 햇병아리 선생님으로 거듭 자라나는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머지않아 내 품에서 완전 분리되는 또 하나의 아픔을 겪어야 하지만 떼어놓는 아쉬움보다는 내가 걸어온 길 보다는 더 편안하고 안락한 길 걸어 갈 거라는 거 의심하지 않는 안도감을 가지고 싶었다.

딸아이가 내손에 쥐어준 편지를 아까워서 바로 펼쳐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읽을 수 있었다.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만큼만, 아빠 만큼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