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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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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사는게 뭔지....


BY 蓮堂 2005-01-12

밤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초저녁에 접한 두 知人들의 부음이 꿈속까지 쫓아와서 잠들지 못하도록 휘저어 놓은것 같다

 

올해 마흔 갓 넘긴,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의 교통사고 소식과 투병중인 친지의 부음은

내글이 실린 책을 펼쳐들고 남편과 얘기를 주고 받던 중에 날라 들었다.

 

그 부인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참상이었고 또 내가 알고 있는 이가 세상과 단절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멀쩡하게 저녁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 운동 나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요절한 사람들의 면모를 눈여겨 보는 습관이 생긴 건 관상학적으로 단명(短命)과 장수(長壽)의 

특징이 한눈에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뒤 부터였다.

 

가장 대표적인게 인중(人中:코와 입 사이에 깊게 패인 골)이 짧으면 단명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귀가 커면 장수 할 상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좀 억지가 따른다

사람이 살다보면 피부가 아래로 쳐지는 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설(說)인데 이 귀도  나이가 듦에 따라서 아래로 쳐지다 보니 귀가 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부인의 인중은 긴것 같았다.

그 부인뿐만 아니라 그동안에 숱하게 요절한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봐도 하나같이 인중은 짧지 않았다는 결론이 서자 이 관상학도 믿을수 없다

 

흉사가 생기면 악성루머와 보이지 않는 징크스에 촛점을 맞추게 된다.

'귀신이 씌었다는 둥, 며칠전부터 사람이 이상했다는둥,꿈이 나빴다는둥...'

그러나 이런 예감을 가지기만 했지 막을수 있는 예방책은 어느 누구도 세우지 못했다.

예감은 그냥 긴가민가의 추측에 그칠뿐이었다.

속편하게 운명이고 팔자로 돌려 버리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복잡하게 파고 들면 어려워 지는게 세상살이다.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신을 믿는 종족이면 '미신'을 믿는 부류들이 많다.

나약한 사람만이 가지는 전용물이 아니고 한번쯤 이런 샤머니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초고속으로 발전하는 문명시대에 등을 돌리는 헤프닝으로 보기엔 터부시 할 뚜렷한 근거는 없다.

 

살아가면서 의존적인게 많다

운명에 의존하고 팔자에 목숨걸고 신에게 매어 달리고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에게 주술을 걸기도 한다

어느것 하나도 명백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것 없어도 무시할수 없는 두려움에 자기도 모르게 갇혀 버린다.

 

원인과 결과가 결코 함수관계에 있지 아니해도 괜스리 원인에 화살을 돌리게 된다.

이런일이 있었단다.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 잘 다녀 오세요' 하면 그날 남편은 무사히 귀가 하게 되는데

그냥 무심하게 '가세요...' 하던날 횡액을 당하면 아침인사에 사고의 책임을 돌리게 된다.

'....오세요' 소리를 하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그 부인은 그자리에서 즉사를 해서 뇌수가 바닥을 홍건히 적셨다고 한다

장례를 치루고 난 뒤에 남편하고 그자리를 지나갈려니까 괜히 뒷꼭지가 당겨서 소름이 돋았다.

깨끗이 뒷처리가 되었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군데군데 튄채로 말라 있는것 같은 착각을 했다.

 

부딪혀 숨이 끊어질 그 순간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느낌이다

머릿속에 그림을 쑤셔 넣기엔 밑그림이 너무 참혹하다

 

生과死를 갈라놓은 싯점이 너무 순간적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파충류, 양서류. 어류같은 하등동물이나 생명이 떨어지는건 모두 찰나다.

생명은 연장도 할수없고 스페어도 없다.

따라서 죽음이라는것도 예행연습도 없도 복습도 안된다.

인생은 편집도 할수 없이 생방송으로 필름은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러기에 생명은 고귀하고 소중한거다.

 

살아오면서 죽은 사람을 가까이에서 본 건 딱 두번이다

시아버님의 임종을 나혼자 지켜봐야 했다....(남편은 서울 파견 근무 중이었다)

이상하게 그  마지막 시간엔 모여있던 사람들이 간발의 차이로 잠시 자리를 뜬 순간에 운명을 달리 하신거였다

그래서 임종할 자식은 따로 있다고 했던가

 

그리고 또 한번은 중환자실에서의 시어머님의 마지막 모습도 역시 나 혼자 지켜봤다.

서둘러 달려오고 있는 다른 식구들은 모두 산소투여량이 100%를 넘어 섰을때 였으니까 임종하신 뒤였다.

 

가까이에서 본 주검은 나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는게 이상했다.

무섭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삶과 죽음의 그 뚜렷한 경계선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딱 한가지였다.

삶은 動이었고  죽음은 靜이었다.

부수적으로 더 잘게 쪼갠다면 삶은 陽이고 죽음은 陰이었다.

 

임자없이 떠도는 흔한 말들이 있다.

'사는 게 정말 아무것두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두 아닌 그 삶에 왜 그렇게 악착을 떠는지 그게 더 궁금하다.

 

들숨 내 쉬지 못하면 죽는다고 한다

부지런히 날숨만 잘 쉬면 사는덴 별 문제 없다고 한다면 너무 오만을 부리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