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전에 딸아이에게 밑반찬이랑 군것질거리를 택배로 보냈었다.
막바지 공부에 너무 힘들어 하는게 안스럽고,또 반찬하는 데 시간 빼앗기는게 아까워서 이것저것 마련해서 보내 주었는데....
친구들과의 간단한 Tea Time 자리........
일상의 얘기를 아무런 부담없이 주고받는 이 시간을 퍽이나 즐기는 우리 친구들.
그렇다고 수다로 영양가 없이 보내는게 아니고 주 대화는 가족들 얘기다.
아이들 얘기가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도중에 딸아이에게 보내준 반찬 얘기가 친구들의 도마위에 올랐다.
"한심한 친구야...이젠 그런짓 하지말어"
항상 건전한 사고로 주변 얘기를 꺼집어 내는 그 친구는 나와 동떨어진 진보적인 사고를 피력했다.
그녀도 내 아이 또래의 남매를 두고 있지만 나와는 사뭇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즉,
미성년을 벗어난 자식은 모든걸 스스로 해결 하도록 버려두라는 거였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혹은 부모의 도리라는 버거운 책임감으로 일일이 다 챙겨주다보면
그게 사랑이 아니고 간섭이나 잔소리로 비춰 질수 있다는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건 결혼을 하더라도 그 뒷바라지는 이어질수 있는건 불보듯 뻔하다고 했다.
늙어 꼬부라지도록 그짓을 할수 있냐는 핀잔과 팔자는 길들이기 탓이라는 충고까지 덧붙혔다.
길지않은 남은 인생 끝까지 자식에게 쏟아부을 필요가 없다고 입들을 모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 친구들 자식사랑 만만치 않아서 쉽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항간에 오르내리는 믿거나 말거나 한 루머를 저마다 쏟아 놓았다.
아들 며느리를 위해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메세지라는게 있다고 한다.
1.김치를 담그더라도 집에까지 갖다주지말고 경비실에 맡겨놓고 와라.
그리고 갖다놨다는 전화를 하더라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해라.(며느리가 싫어한대나)
2.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아픈 얘기는 될수 있으면 하지 마라.(양치기 소년 되기 쉽다)
3.손주는 가능하면 돌봐주지 말아라.(봐주고 자칫 뺨 맞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4.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에 오라는 소리 하지 마라.(기름값 운운한다)
5.자식들 외식 자리엔 눈치없이 끼이지 마라.(메뉴가 틀려서 거북하단다)
한술 더 뜨서 기가막힌 얘기도 있다.
요즘 짓는 아파트 이름이 전부 발음조차도 되뇌기 어려운 외국 이름이다.
wertewq타운, wetweq빌라, fsasdtew하우스, asfgre호움,.......
그 이유는 부모가 자식사는 아파트 이름 제대로 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아파트 이름을 모르니까 찾아올수도 없는 잇점(?)이 있다고 한다.
비록 부풀려서 떠도는 우스개였지만 지나칠수 없이 두터운 뼈가 박힌 소리였다.
갑자기 좌중이 숙연한 분위기로 무거워졌다.
아직은 부모 모시고 있는 세대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내 코앞에 닥친 현실 마냥 모두가 공감하는 서글픔이었다.
문득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생각났다.
그는 자식들에게 소외 당하기 싫어서 죽을때까지 재산권을 행사했다.
금고키를 항상 요 밑에 깔고 누워서 잤고, 빵 한조각까지도 저울로 달아서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연스럽게 자식들이 모여들었다.
동서고금이 크게 다르지 않는 부모자식간의 틈새였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제일 바쁜게 택배회사다
객지에 사는 자식들에게 양식과 양념 그리고 과실들을 박스가 미어 터지도록 부쳐 주기 때문에 택배회사가 호황을 누릴수 있도록 톡톡히 한 몫을 했다
공산품이 시골에 비해서 싼 반면에 흙에서 나는 농산물은 상대적으로 비싼 도시의 자식들은 앉아서 떡 받아먹는 재미에 부모의 그 고충을 모른다.
씨부리고 물 주면 농사는 그냥 되는걸로 아는 철부지 자식들은 부모를 뵙기 위해서라도 소출을 얻으러 오는 명분을 배울줄 모른다.
그 친구는 역설했다.
"아무것도 보내주지 말어...지들이 아쉬우면 자연히 올건데...."
"돈주고 사먹지 일부러 오겠냐고....다녀가면 손핸데..기름값에다가 용돈까지.....그돈이면 배 터지게 살건데"
"안오면 시장에 내다 팔면 되지 머..돈도벌고...."
"그러면 부모자식이랄게 머 있냐"
"어차피 거래를 염두에 두고 있는 자식이라면 필요 없다구...."
"거래가 아니고 부모자식간의 情인데 비약이 심하다"
"비약이 아니고 현실이야.......애들 결혼 시키고 나면 아마 실감할걸?"
"악담두....ㅎㅎㅎㅎ"
알맹이는 숨겨놓고 모두들 겉도는 얘기로 그쳤지만 나름대로 품고있는 생각은 탑을 쌓을거다.
남의 얘기가 아닌 내 얘기로 어느날 하소연 하게 될날을 미리 감지해야 하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시어머님이 살아 계셨을때 나도 지금의 젊은 자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내가 살고 있는곳과 60리 지척에 살고 있었던 관계로 새벽이나 한밤중에도 달려 가야 했다.
주로 몸이 아프다고 하소연 하시면 시간을 끌수 없었던 절박한 맘으로 달려가면 옴몸에 진이 빠졌다.
혼자서 죽어나갈것 같은 불안함에 시어머님은 그렇게라도 자식을 옆에 두셔야 했나부다.
백번 이해는 하는 부분이었지만 심장이 멎을만큼 긴박한 사정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새벽이나 한밤중에 비상을 건 시어머님이 곱게 보이지 않았었다.
어느날 새벽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달려가니......
연탄불이 꺼졌으니 불 갈아 달라고 하셨다.
팔이 아파서 이불빨래를 못한다고 하셨다
허리가 아파서 청소를 할수 없다고 하셨다.
반찬이 떨어졌다고 하셨다.
같이 모시고 살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거절 하셨다.
아직은 자식손에 밥 안 얻어 먹는다고 버티셨다.
비록 건강치 못한 체구였지만 의지력 하나로 버티시는 그 자존심을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매일 비상 걸리느니 차라리 한집에 살면 두발 뻗고 편한 잠은 잘수 있을 것 같아서 여러차례 사정을 했지만 그럴때마다 하시는 말씀은 항상 일정했다.
"전화만 하면 니들이 달려 오는데 뭣땜에 불편하게 한집에서 우글 거리냐?"
자식을 의지 하시는 맘이 남 다르게 큰 만큼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맘 또한 커셨던 시어머님이셨다.
휴일도 맘놓고 나들이를 할수 없었다.
시어머님은 이미 그 전날부터 다음날 할일을 미리 만들어 놓고 휴일 스케줄에 구멍을 내셨다.
호박덩굴 걷워라..텃밭에 거름줘라...풀 뽑아야 된다..마루에 보온장치가 미흡하다........등등
시어머님의 주문은 끝이 없었고 그럴때마다 난 멀리 도망가서 살고 싶었다.
멀리가서 살면 자주 들락거리지 않아도 될성 싶었던 얕은 생각을 이젠 나의 자식들이 할 나이였다.
핵가족이 이젠 자연스럽게 가족 구성원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그 옛날 대가족시대의 그 끈끈하고 따뜻했던 시절을 얘기 하기엔 모든게 말라있다.
부모자식간의 그 예절과 도리, 형제간의 애틋한 우애, 인척간의 핏줄사랑,.........
증발된 채 제자리로 돌아올줄 모르는 아름답던 우리네 전통가족의 모습은 이제 찾을길 없다.
길흉사가 아니면 인척간은 물론 가까운 형제간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명분은 이럴때 용케도 써 먹힌다.
이 명분을 들이대면 다 용서가 되고 이해가 되고 배려를 할수 밖에 없다.
맘이 없는게 아니고 시간이 없다는데 미주알 고주알 따질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하루전날 한밤중에 왔다가 아침상 물려놓고 짐 꾸려서 떠나기 바쁘고 - 차가 막힌대나 - 오손도손 정담을 나눌 만큼 많은 시간을 가족들에게 할애 하지도 못한다.
마누라 몰래 부모 옆구리에 찔러넣는 많지 않은 돈을 부모는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있다가 손주녀석들 세뱃돈으로 다 털린다
결국은 제 새끼 주머니로 들어갈 돈을 잠시 부모님 주머니에 맡겨 놓을 뿐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자식에게 내미는 손은 한없이 펴져있고 부모에게 내미는 손은 자꾸만 오그라 든다고.....
자식에게는 아무리 퍼주어도 모자라는 것 같고 부모에게는 조금만 주어도 남아돌 것 같은 ,
기우는 저울대 눈금을 고개 틀어서 바로 볼줄아는 혜안은 아직도 흐려 있는것 같다.
모든 자식들이 다 이러하진 않을진대 왜 도매금으로 넘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소수가 다수를 잠식할까봐 두려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