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꼭대기가 있었는지, 과연 손끝에 피멍 들여가며 기를 쓰고 기어올라가야 할 정수리가 있었는지 한 켠에 의구심 품고 自問할 때가 더러 있었다.
실눈 뜨고 이맛살 찌푸리며 올려다보아도 눈 속에 잡혀 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악착을 떨었는지는 몰라도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아득하고 멀게 만 느껴짐은 버리지 못한 미련덩어리와 욕심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바닥에 닿아있는 출발점마저도 희미하게 가늠이 되지 않았건만 한계선이 그어지지 않은 頂點에 왜 그렇게 욕심을 내었는지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졌다.
세월이 토해낸 배설물에 코 박고 현실에 안주하기 싫어서도 두고 왔던 바닥길이 그리웠고, 고여있는 일상에 구린내가 나는 것 같아서, 때론 아무런 의미 없이 허물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의미 없이 허물어진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는 몰라도 그냥 나를 버리고 싶은 맘이 순간적으로 나를 옥죌 때면 뭇 귀퉁이에 세웠던 빳빳한 각을 뭉개 버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풀 먹인 삼베고쟁이 같은 내 성격이 쉽게 쳐 질 거라는 건 나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젠 세월이 마모시켜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은근하게 믿는 구석도 없지 않았다.
껄끄럽고, 쉬운 여자가 아니라는 나의 이미지에 대한 남의 입방아를 그리 부정하고 살지 않은 건 그나마 내가 그리 아둔하지 않은 머리를 가졌다는 착각을 하고 산 덕이다.
黑과白, 正과邪 그리고 아래위에 대한 확실한 경계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나를 보고 한템포 줄이라고 충고한 친구의 말에 발끈한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미안하고 민망한 맘이 드는 건 묵혀온 세월 덕이 아닐까 싶다.
콤파스가 중심에 발목 잡힌 채 빙빙 돌아다녀야 할 한계선이 일정한 것처럼 제자리에 발 묶어놓고, 그렇게 한번쯤은 나 자신을 여기저기 떠밀어내며 현실도피의 꿈도 꾸어 보았었다.
약간의 언잖은 일이 늦은 시간 현관문을 밀치고 나오게 했다
여름밤의 공기가 싫지는 않았지만, 막상 집을 나서니까 마땅히 갈 곳 없는 나의 몰골이 한심스러웠다.
문득, 멀리 있는 친구가 생각이 났다.
가까이 있으면 불러내서 못 마시는 맥주 잔이라도 기울이면서 웃음 반 울음 반으로 밤을 새우고 싶은데 손을 뻗혀 부르기엔 너무 멀리 있다.
방향키를 잃어버리고 잠시 주춤거리다가 멈춘 곳은 요란한 네온사인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노래방 앞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안면 있는 내 또래의 안주인이 놀라서 눈으로 묻고 있었다.
웬일이냐고....이 늦은 시간에....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구석진 조용한 방으로 밀어 넣는다.
내 취향을 꿰뚫고있는 주인은 벌거벗은 외국모델이 나오는 화면을 점잖은 양반들 탁상 공론하는 것으로 재빨리 바꿔 놓는다.
그리고 따끈한 커피 한잔을 놓고 나가면서 웃는다.
고마웠다.....작은 친절이...그리고 배려가....
스무 곡을 선곡해서 혼자 부르려니까 영 싱겁고 어색했다.
정체 모를 덩어리에 눌린 목 줄기가 음을 토해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용암덩어리가 감당이 안되지만 그냥 주저앉아서 그대로 화석이 되고 싶었다.
숨소리 멎어도 좋고 울컥거리는 덩어리 그대로 굳어 버려도 좋다.
머릿속 하얗게 비울 수 있다면,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밋밋한 가슴일지언정 차갑게 식어 버릴 수 있다면 이 시간이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 상태라도 좋을 것 같았다.
이런 날 가요는 사절하고 싶다.
비록 꼬깃꼬깃 구겨서 밖에는 부를 수밖에 없지만 난 팝을 좋아한다.
Beatles, Bee Gees, Petti Page, 그리고 Olivia Newton John..등등의 가수도...
우리나라 가수가, 우리 대중가요가 이런 날 나를 감동시켜 줄 수 없다는 게 못내 불만스러웠다.
피를 토할 듯, 애간장을 녹일 듯, 영혼을 삼켜 버릴 듯한 절절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입 속에 마음속에 가두어 두고 오랜 시간 쌓여 온 일상의 부패한 퇴적물을 노래 속에 버무려 쏟아내고 싶었는데 미직지근한 감정이 맘에 안 들어서 도중하차하고 나와 버렸다.
밤이슬이 소롯이 내려앉은 축축한 공기가 한꺼번에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자정을 아슬아슬하게 넘겨버린 시간이지만 행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는 낮이나 다를 바 없 이 밤 공기를 가르는데 어디선지 여자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다 죽여 버릴거야......모두 다 쓸어 버린다구........."
술에 절은 듯한 여자의 탁한 음성에 발걸음이 느슨해졌다.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토악질을 해 댔다.
거리낌없이 울부짖고, 토해내고 거칠 것 없이 휘젓는 그 객기와 자유로움이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도 나처럼 허물어지고 싶었던 걸까.......'
초점 잃은 동공으로 나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히죽이 웃는다.
얼떨결에 같이 웃어 주었지만 안면은 없다.
이 늦은 시간에 거리를 배회하는 내 모습이 술 취한 저 여자의 눈엔 어떻게 비춰 졌을지 궁금했다.
비틀거리는 그 여자의 눈에 나 역시 온전한 모습으로는 보여지지 않았을 거라는 짐작에 정체 모를 쾌감을 느꼈다.
만취된 갈 지(之)자 걸음으로 비틀거리는 게 허물어진 모습인지 아니면 남의 눈 피해서 외간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게 나를 버리는 건지는 모르지만 반듯한 정의는 무시한 채 누군가의 눈에 내가 나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잠시나마 담겨질 수 있다면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헛구역질이라도 쏟아낼 자신은 있었다.
집밖을 나설 때는 이런 감정이 아니었다,
달아나고 싶었고 이탈하고 싶었는데 난 한 발자욱도 떼어놓지 못하고 어느새 중심을 향해서 끌려가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빛이 검다고 얘기하지 않을련다.
다만 검게 보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허물어지고 싶은 날 난 한 귀퉁이도 허물지를 못했다.
그래서 더 바보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