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길 한번쯤 뒤 돌아보면 굴곡없이 편편한 길 걸어온 사람은 없을것이다.
지긋지긋한 기억, 몸서리 쳐 지게 잊고 싶은 기억,....... 넘어지고 깨지고, 찢기고.....
그래도 지나고 나면 '아.....그때는 그랬었지'로 희미하게 웃을수 있으면 그래도 좋다.
죽음을 앞둔 서양의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참으로 잘 살고 간다, 다시 태어나도 난 이렇게 살고 싶다,'
지나온 생을 이렇게 자신있고 확실한 자기주관에 의한 삶을 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것 같다.
길지않은 생을 살면서 내가 겪은 - 기억 하기도 싫은 - 한토막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가 내 둘릴 정도로 되 새기기가 싫다.
당시 중학교 일학년이던 딸애가 지방 병원에서는 그 병명을 찾을수 없는 희귀병에 걸렸다.
맹장염이라고 아이의 배를 가르더니,
회복이 되지않자 이번에는 십이지장을 잘라야 한다고 메스를 들이댈것 같은 엄포에
우리 부부는 다른 병원을 전전 하다가 급기야는 서울 대학 병원에 가서야 확실한 병명을 알고는 하늘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어둠을 보았다.
'알레르기성 자반증'이라는 생소한 병명도 우리를 불안하게 했지만
특효약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우리는 절망 했다.
아이는 나날이 쇠약해져갔고 기대를 걸고 있었던 의사 마저도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알수 없는 혈압의 상승과 죽을듯이 뒹구는 복통, 그리고 몸 구석구석 돋은 붉은 반점.
드디어 다른 병원으로 이송 하라는 막다른 선고가 내려 졌고
아이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시커멓게 드리웠을때 난 각오를 했다.
대학병원인데....... 더이상 갈곳도 없는데......
결국은 집으로 데려 가라는 뜻이었다.
아파서 이성을 잃고 있는 애를 집으로 데려 가란다...의사가.......
당시 아이가 입원 해 있는 병동은 7층 소아병동 이었는데
아이가 잘못 되면 이 7층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릴 나 혼자만의 음모를 꾸몄다.
아이를 잃고는 살아갈수가 없을것 같은 나를 위한 이기심이 나를 그렇게 부추겼다.
목빠지게 좋은 소식 기다리는 남편과 어린 아들 녀석의 안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고통으로 평생을 사는것 보다는 딸아이와 함께 가고 싶었다.
뇌파검사를 하기 위해서 12시간을 잠을 재우지 마라는 의사의 명령은 죽음보다 더 했다
잠을 자야 잠시라도 고통을 잊는 딸아이를 12시간이나 잠 재우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아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밤새도록 병원 내를 돌아 다녔다.
아이가 잠 들려고 하면 이쑤시게로 사정없이 찔러댔다.
아이는 울면서 제발 찌르지 말고 단 일분만이라도 재워 달라고 사정 했을때
난 아이를 끌어안고 몇번이나 통곡을 해야 했다.
다행이 아이가 한달 반만에 기적적으로 회복했을때 난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가족들을 보니 일순간의 이기심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고
극한 상황에서 이겨낼려는 마음보다 포기할려던 마음이 나를 한없이 면목없게 만들었다.
친정에서는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오빠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탓에 난 강하지를 못했고,
시집에서도 정신적으로 좀 고단했을지는 몰라도 역시 어른들의 보호막으로 인하여
삶에 대한 강한 면역성 만큼은 키우지 못한것 같았다.
그래서 쉽게 자신을, 그리고 가족을 버리려고 했던 맘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얼굴 붉히게 만들었다.
남편에게 힘들게 고백을 했을때 남편은 무척 놀랬다.
'자네에게도 그런 무서운 깡단이 있었나?'
자식을 잃을 지경인데 무슨 일인들 저지르지 못할까......
아직도 난 딸애를 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고통 속에서도 힘들게 살아난게 고마웠고 자기몫 다하고 사는게 기특해서 눈물이 났다.
잡초가 생명력이 끈질기다고 한다.
살면서 잡초의 근성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한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보니
따뜻한 온실이 결코 삶을 지켜 주지는 않는다는 걸 몸소 체험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