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왠만한 집은 거의 목욕탕 시설을 해 놓고 산다.
수도 꼭지만 잡아 돌리면 뜨거운물 찬물이 그냥 막힘없이 쏟아지고
땀빼고 살 뺄려고 사우나실 들락 거리면서 하릴없이 시간 죽이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거리는
목욕탕을 보면은 옛날 생각이 들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내 어릴적 기억속에 남아있는 목욕탕은,
거칠은 세멘트 바닥에 미지근한 물, 그리고 까만 때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면 손으로 밀어내고
그 물에 얼굴 쳐 박고 코와 귀 막으며 반은 그 물 마시고...ㅎㅎㅎ
광산촌에서 자란 나는 초등학교 다니면서 혼자서 목욕을 할 나이가 되었음을 일찌감치 감지했는데
그 목욕탕이라는게....
설명을 하자면 뒤로 자빠질 얘기만 나열해 보고 싶어진다.
인구 2만 여명이 북적거리는 결코 작지만은 않은 광산촌..
그 광산촌의 유일한 목욕탕은 그야말로 그 주변의 주민들을 흡수 하기엔 역 부족이었다.
石公에서 광부들 복지 차원에서 운영하던 목욕탕이었다.
요금은 공짜..
누구든 들어갈수 있다는게 문제였다.
하루에 세번 입욕 하게 되어있는데 그 입욕 시간이 광부들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오전 8시,오후4시,그리고 밤 12시...
제일 붐비는게 오후 시간이었고 그 나머지 시간은 왠만큼 부지런 하지 않고서는 갈수가 없었다.
입욕시간이 되면은 줄지어 늘어선 세숫대야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고
입욕시간 수시간전에 대야만 갖다 놓으면 사람은 늦게와도 대야 놓였던 자리에 들어설수 있었으니
대야가 장땡이었다.
목욕탕 문을 따는 노인네가 등장하면 모두들 상전 출현 한것처럼 문앞으로 모시었고
(이때는 긴장과 초조와 불안으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문을 따기가 무섭게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그 속도는 시속 50킬로는 능가하는것 같았다.
앞자리에 섰던 사람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인정 사정 볼것 없이 그냥 밟고 들어갔다.
그러니까 힘 약한 사람은 앞자리가 저승길이 될지도 모르는 기막힌 상석이었다.
아예 뒷자리에 섰다가 꼴찌로 들어가서 더러운 물에 몸담그고 오는게 명 보전 하는 길이었다.
탕안의 광경은 또한 구경거리..
목욕탕 관리하는 노인네는 욕조 언저리를 돌면서 탕안에서 때미는 사람이 있으면
바닥씻는 거친 수세미로 등어리를 사정없이 긁어 대었다.
아니면 지팡이로 어깨를 내리 치던지...
완전히 포악한 湯女였다 ..ㅎㅎㅎㅎ
그나마 별로 크지도 않은 욕조를 반으로 갈라놓고 반은 여자 광부를 위해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일반인은 얼씬도 못하게 했으니 그 작은 욕조안에서 물에 몸 담글수 있는 것 부터가 은총이었다.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좀 늦게 나오면 행구지도 못한다
물을 다 끊어 버려서 몸에 때를 달고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른들은 그래도 요령이 있어서 행굼까지 완벽하게 하는데
아이들은 좋은 자리 차지하고 있다가도 어른들한테 밀려서 구석으로 몰리게 마련이고
다 씻었다 싶어서 옷 입을려고 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때가 밀리는 거였다.
말하자면 때를 불려 가지고 그대로 옷을 입는 형상이다.
어쩔수 없는 그시대의 헤프닝으로 돌릴수 밖에...
내가 직장 다닐때 난 특별 대우를 받았다.
별도로 시간을 만들어서 오라는 전갈을 해주면 제일 깨끗한 물에서 몇시간이고 즐기다가 나왔다.
석공의 윗전부터 줄줄이 안면 트다보니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문은 열려 있었다.
그 시절은 그래도 공무원이 무소불위 였던것 같았다....하하하
지금 생각해도 설탕시럽 같은 끈적임에 나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곤 한다.
가끔씩 친정엘 가보면
광부들을 위한 사택도 전설이 엮어진 목욕탕도 간곳이 없다.
사양길에 접어든 석탄 산업이 더 이상 버틸 명분을 잃어버렸기에
그 자리엔 이름모를 풀더미와 줄이 비뚤어진 밭떼기와 작은길이 열려 있을뿐이었다.
그 전설을 그나마도 간직하려고 '석탄 박물관'이라는걸 만들어 놓고
관광산업에 눈독 들이고 있는 지방 자치 단체에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잃은 만큼 얻은게 있을지라도
그 시절 그 기억을 대신할 소득은 어디에서도 찾을수가 없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