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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한 인생


BY 수련 2006-05-12

‘인생은 공평하다’는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보다는
불공평하다는 말에 공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
정말로 이 세상이 공평하다면
빈부의 격차가 왜 더 벌어지고 있는가.
분명 삶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처음에는 불공평한 조건들로 늘
피해의식을 갖고 살았는데 나이가 더 들수록
결국은 평등한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40대에는 지식이 평등해지고
50대에는 외모가 60대는 성(性)이 평등하고
70이 되어서는 건강이 80에는 재물이
90이 넘으면 생사가 평등하다는 말이 있다.

젊을 때는 나와 다른 것이 많은 것 같으나
나이가 들수록 비슷비슷해진다.

결혼한 후 얼마동안은
수준이 어떻고 집안이 어떻다니 하면서
싸움도 많이 했는데 살붙이며 살면 살수록
그 기준들이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처럼
역할이 다를 뿐 나와 다른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시간은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하다.
하루 24시간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사람에 따라 결과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 함은
생명과 같은 시간을 소진(消盡)하는 사람과
잘 선용하여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공평(公平)하면서도
가장 잔인하고 무섭다는 양면성(兩面性)이 있다.

 


바이블에서는 이 시대가 너무도 악하기에
곧 마지막 날은 아무도 모르기에
세월을 아끼라고 권하고 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가 없다.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 모든 흔적을 남겨야 한다.
그러므로 공평한 기회가 주어질 때 잘 살려야 한다.


 

시간의 공평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나를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내 자아 속의 욕심을 포기하기 위해
아침에 홀로 그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지혜이다.

 

이렇게 시간이 평등한 것을 알고
잘 활용하는 일은 바로 기회(機會)의 평등이 되고 있다.

돈 많은 집 자녀들이 서울대 진학률이 높다는
결과에 대해 서로 상반된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아버지가 유명학교 출신이면
자녀의 입학확률도 세배나 높아진다고 한다.

평등이란 기회의 평등이지 결과의 평등이 아니다.
기회는 다 주어지지만 노력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되는 진리다.


먼저 자신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 때에는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고
그 길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 길이 아니더라도 다른 길도
있었다는 것을 늦게라도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한다.


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기회의 평등을
살리지 못한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원인이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실패는 성공을 지향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물론 기회에는 능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감안해서
기회의 평등에서 환경적인 약점이 많을수록
남보다 몇 배 노력해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 이제 공평(公平)한 인생을 정리해 보자.
시간(時間)이 평등하다는 것은 기회의 평등을 의미하고
기회(機會)의 평등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死)의 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죽음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누구에게나 예측 없이 오고,
출생과는 다르게 불현듯 다가오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우리 주위를 배회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악한 인간에게 그런 불청객까지 없었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게 살아가겠는가.


하이덱거는 그 누구도 대신(代身)할 수 없고
혼자 해결해야 하는 죽음에 대해
바른 인식만 갖게 된다면
죽음에서 자유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각오로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죽음 이후에 대한 일은 누구도
올바르게 설명할 사람은 없다 해도
가장 확실한 것은 한 평생 살았던 우리 인생의
내신(內申)성적이 된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은 동전의 양면(兩面)과 같은 일이기에
삶에 대한 애착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조지훈은 병을 정다운 벗으로 비유했는데
죽음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네의 생은 절실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요
죽음은 실존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통하여 신은 인생을 평가(評價)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죽음이란
어떻게 사느냐하는 삶의 문제다.

죽음을 염두에 두는 종말론적인 삶
즉 죽음을 항상 의식하면서 결단하며 사는 삶이기에
죽음이 더 쉽고 삶이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진정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