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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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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끄러운 사이들.


BY 수련 2005-09-21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이 다가오면 남편은 주변 知人들과 일가 친척들에게
인사치레로 큰 부담이 가지 않는 선물을 한다.
근무지가 도청일 때는 주로 양말 세트를 준비하고
시골일 때는 그 지역의 특산물로 하는데 주로 과일이 된다.

 

이번 근무지는 바다와 접해 있는 섬이라 해산물이 많이 나지만
배달 과정에 문제가 있어 어떤 과일이 좋을까 알아왔더니
포도(거봉)가 적당한 것 같았다.

5년 전에 한 농부가 벼농사로는 큰 수입이 되지 않아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는데 토양과 날씨가 포도 키우기에 아주 적합하여
당도도 높고 수확률도 좋아 농가소득으로 유익하여 그 동네 전체 농가와
합심하여 대 단지 포도농장으로 일구어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하였다.

배, 사과는 부피도 크고, 5kg 한 상자 거봉 포도가 선물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사촌형님, 시누이들, 조카들, 퇴직한 선배들, 친구들.... 이래저래 한 스무 상자쯤 된다.

이번 추석에 배달 받아 먹어본 사람들은 다들 맛나다는 전화를 했다.
더 먹고 싶으면 상자 겉에 씌어진 전화번호를 보고 주문해서 사 먹으라고
선전까지 하니 지역발전에 도움도 되니 일거양득이다.

 

몇 년 전부터 공무원도 노조가 생겨 명절이 다가오면 고위직 간부들의 집 주변에
공노조직원들이 조를 짜서 잠복하고 있다가 택배나 어떤 이가 선물꾸러미를 들고 나타나면
뒤따라와서 대문을 열고 그 부인이 직접 받으면 '뇌물수수죄(?)'로 추궁을 하여
난감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다.

실제로 당한 부인들이 전화를 해주어 문을 열어주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는
헤프닝도 벌어진다.
나도 명절 때만 되면 집안에 있으면서 전화도 안 받고 문을 열어주지를 못하는
안쓰러움에 아예 집을 비우고 실없이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저녁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더욱 더 조심스러웠다.
시청 관사인줄 알기에 주변 이웃이 더 무서웠다.

 

-안 주고 안 받기-

 

진짜 편하고 좋다. 사실 선물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하는지
그 심정을 잘 안다. 아주 오래 전에 남편의 상사 집에 갈 때 백화점에서 오랜 시간
서성거렸던 고난을 생각하면...그 후로 남편에게 일방적인 선언을 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로 심부름을 시키지 마라고 했다. 남편의 출세에 내조의 힘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실력대로 올라가라고 냉정하게 얼굴을 돌렸다.

 

오늘 오전에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더니
안면이 있는 과장부인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추석연휴가 지난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어쩐 일인가 싶어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더니 엉거주춤 들어서서
손에 든 분홍색 보자기를 끌렀다.
짙은 밤색의 액체가 든 병이다.
밤 꿀이란다. 시골 친정에 갔다가 꿀을 떴기에 한 병 가져왔다는데
그 성의를 봐서 받아야하는지 도로 돌려보내야 할 지 잠시 고민스러웠다.
내일 있을 모임을 주관하는 부서의 부인인데 차마 전화로만 보고를
할 수 없어서일까. 인정스런 시골인심이라고 억지로 끼워 맞추며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어려운지 차 한잔에도 그저 불편한 자세로 안절부절 한다.


나도 예전에 상사집에 갔을 때 그랬지.
남편의 직급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 상사의 부인인 그 사모님도 어려워서 도망치듯
나왔던 기억에 과장부인더러  편하게 앉으라고 거듭 권했다.

숟가락으로 꿀을 떠먹어 보기도 하고 과장된 표현으로 편케 해주려고 했으나
되려 내 행동이 어색한지 본인은 어서 자리를 뜨고 싶어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서둘러 일어서서 어느새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선다.

 

어느 잡지에서 국정원에 다니는 남편을 둔 부인들이 남편의 직장을 드러내놓고 밝히지
못 한다는 애로를 말했다.
나도 공무원 가족이라고 이웃들에게 내 입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
죄인은 아니지만 내 행동 하나 하나가 그들의 관심거리로 될 수도 있고 괜히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특별한 직장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반 행정 공무원인 나도 스스로 남편의 직장을 잘 밝히지 않았다.

 

같은 도청에 다니는 이웃이 있으면 일부러 그 집과는 교류를 피한다.
특별히 내조를 잘하는 것도 없으니 언행이라도 조심하여 남편에게 누가 되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철칙을 세워서 조신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여자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일상의 말들이 자칫 남편의 위신을 깍이게 만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여기도 객지라서 아는 이가 없어 무척 적적한데도 혼자서 잘 놀고 잘 지낸다.
공식 행사 외에는 직원부인들을 따로 만나지도 않을 뿐더러 전화도 삼가 하는 편이다.
엘리베이트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시선, 경비아저씨의 저자세....
남의 이목이 번다해서 불편하다.


자연스레 스스로 경계선을 긋게되고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 접근 금지를 만드는 편이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입에서 냄새를 풍기며 퇴근하는
 남편을 맞을 때도 부지기수다. 회식을 하고 오면 꼬빡 자정을 넘기도록 말을 하지 못해 혼자서 구시렁거리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남들에게 어려워 보이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나 또한 얼마나 이중성을 지녔는지 내 스스로 가증스럽기는 하다.

친구들이나 카페식구들하고 어울릴 때는 영락없는 수다쟁이 아줌마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지만 남편의 직장과 관련된 장소에서나
모임에서는 요조숙녀처럼 말을 아끼고 눈을 내리깔고 고상한 척한다.
그러다 보니 직원부인들 간에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보이나 보다.

 

내일, 3개월에 한 번씩 모이는 공무원부인들의 모임이 있다.
사실 나 또한 그런 자리가 편치는 않다. 먹는 것도 신경 쓰이고 눈을 맞추려는 시선들도
부담스럽다.
오늘 벌써 네 번째 전화가 온다. 국장 부인들이다.
"사모님~ 추석 잘 쇠셨어요?"

"아, 예. 잘 지내셨어요?"

"....내일 모임이지예. .."

그 다음 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그럼 내일 뵐게요."

왜 전화를 해서는 당혹스럽게 하는 것일까.
명절 선물을 못해서 미안해서? 아니면 오랜만에 만나려니 쑥스러워서?
이렇게 불편하고 형식적인 전화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내일 자연스럽게 만나서
인사를 나누면 될 일을.

 

속이지 못하는 천성인 수다쟁이 아줌마가 되고싶다.
에이~.  내일 나의 실체를 드러내고 올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