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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BY 수련 2005-03-30

언니! 
요즘 이가 아프다더니 좀 괜찮아?
이 서방도 잘 있고, 혜은이도 학교에 잘 다니고 있어.. 상민이는 다음 달이면
제대하고 내려올 거야. 나도 여전하지 뭐. 장아찌 담그려고 햇 마늘 한 접 샀어.
그러고 보니 언니에게 몇 년만에 편지를 써 보는 거지?. 족히 30년은 훌쩍 넘었네.

대구로 시집간 언니가 해를 넘겨도 임신소식이 없으니 글을 모르는 엄마는 나에게 대필을 시켰지. "일자야! 아즉도 얼라는 소식이 없냐?. 퍼뜩 들어서야 할낀데 ,걱정이 태산같다 아이가........" 엄마가 불러 주는 대로 사투리를 그대로 썼을 거야.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 그런데 편지를 쓰면서 오래 전 이야기지만 가슴이 저려오네.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내려온 언니를 데리고 엄마는 언니 따라 들어가려는 나를 뿌리치고는
남이 볼 새라 방문을 꼭꼭 걸어 잠갔지만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엄마의 울음소리에 이어
언니의 가냘프게 우는소리도 들렸어. 엄마와 언니가 왜 우는 지도 모르고 방문 앞에서
어린 나도 서럽게 목놓아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게 떠올라. 지금 눈물이 날려고 해.

더운 여름에 비지땀을 흘려가며 불을 지펴 약을 달여서 대구까지 몇 번이나 인편에 보낸
보람도 없이 언니는 끝내 아기를 갖지 못해 3년 만에 소박을 맞고 돌아왔던 날이었어.
기껏 3년밖에 안되었는데 시어른들이 씨받이를 근처에 방을 얻어 들여놓는 바람에
언니가 알게 되었고, 이혼으로 이어 졌다는 사실을 엄마를 통해 훗날에야 알게 되었어.

6남매 우리 집의 맏이인 언니,
그리고 막내인 나와 무려 14살이나 차이가 나는 바람에 언니와 지냈던 내 어린 시절은
두어 가지 외에는 기억이 없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엄마혼자
꾸려 가는 가계에 보탬도 되고, 또 동생들의 학비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구로 취직하러 갔었다는 얘기도 들었어.
지금 생각하니 언니는 엄마의 버팀목이었던 것 같아. 철없던 오빠들과 나는 명절이 되면
언니를 기다렸는지, 선물을 기다렸는지 번갈아 가며 동네 어귀에 나가서 기다리곤 했어.
우리 뒷집에 사는 내 친구 남 선장 댁 둘째딸 미선이 알지?
자꾸만 고무줄에 걸려 벗겨지는 고무신을 아예 벗어버리고 맨발로 고무줄 뛰기를 하는
나와는 다르게 둔탁한 소리를 내며 폴짝 폴짝 잘도 뛰는 미선이의 까만 운동화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 해 추석 전날, 환한 보름달과 함께 들어선 언니가 내게 내민 까만 운동화!.
누가 내 소원을 언니에게 전해주었을까. 그때 달을 보고 절을 하는 나를 보며 오빠들과 언니는 막 웃었어. 아마 이 대목을 읽으면 기억 날 거야. 난 아버지가 달에 산다고 생각했거든.

잊히지 않는 언니의 기억이 또 하나 있어. 하얀 세라 복을 입고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고등학교 때의 언니는 영화배우 같았어. 언니 친구들과 찍은 사진 내가 가지고 있어.
다음에 보여줄게. 전에 큰오빠 집에 가서 가지고 왔어.
수영선수인 언니는 그 당시 실내 수영장이 없어서 연습하러 가포 해수욕장에서 2킬로 남짓 떨어진 돝 섬까지 왕복으로 헤엄쳐서 돌아오는 코스인데 벗어놓은 언니 옷을 지키라며 어린 나를 꼭 데리고 갔었지. 그때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언니는 모를 거야.
바닷물 끝에 쪼그리고 앉아 언니가 섬을 한 바퀴 돌고 올 동안에 파도에 가려져 언니가 보이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은 줄 알고 "언가야!" 하고 엉엉 울다가 언니의 하얀 팔이 번쩍 치켜 올라오면 "휴~" 한숨을 쉬면서 언니의 옷을 꼭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때 울던 나를 달래던 까만 모자를 쓴 수염이 듬성듬성 난 남학생이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니의 남자 친구였지 싶어. 아, 이름이 생각난다. 주은이 오빠, 내가 언니 편지 심부름 많이 했었지?.
몇 년 뒤에 둘이 좋아해서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 오빠네 엄마가 우리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극구 반대를 해서 결혼을 못했다며. 그 얘기를 어떻게 아느냐고?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했을 때 그 오빠네 엄마가 '문 세광'의 친척이었대. 그때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말했었어. "아이고, 그 집 아들과 갤혼을 했으면 우찌 되었겄노."
그렇다고 언니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산 것도 아닌데...

"내를 닮아서 얼라를 많이 낳을낀데 삼신할매는 와이리 야속합니껴".
그러면서 엄마는 오랜 세월 동안 언니 때문에 한숨을 내 쉬곤 했어.
언니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였어.

그 후로 자식이 일곱이나 되는 재취자리로 간다고 했을 때 내가 가장 반대를 많이 했었지.
내 속으로 난 자식도 미울 때가 있는데, 남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잘 키워낸 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고. 내색은 안 했지만 언니 속이 많이 상했지?
자식들을 다 출가시키고 나자 형부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8년 동안의 긴 병 끝에 형부가 돌아가셨을 때가 십 년 전 일인데도 형부 장례식의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언니는 아마 생각도 하기 싫을걸. 형부 살아생전에 선산에 형부가 묻힐 자리 옆에 언니의 묘 자리도 정해 놓고 해마다 선산에 따라가서 풀을 베곤 한다며 나에게 자랑을 했었던 것 기억나? 그런데 막상 형부가 돌아가시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나는 이 서방과 묘소에 따라가서 어정쩡하게 한 쪽에 서 있었고,
언니는 난 데 없는 낯선 관 하나를 보고 순간 사태짐작을 했는지 뒷걸음을 치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지. 형부의 자식들이 언니에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낳아준
친 엄마의 묘를 형부 옆에 이장시키고자 했던 거야. 낳아준 정이 길러준 정을 앞지르나봐.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남의 자식 키워봐야 하나도 득 될 것 없다면서 재가한다고 할 때 한사코 말렸잖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애지는 언니를 데리고 이 서방과 서둘러 산을 내려 왔던 일은 정말이지 끔찍해서 떠올리기도 싫어.

그 후로 형부의 자식들과 점점 뜸해지고, 언니는 한동안 허탈감과 배신감에서 헤어나지
못해 한 달 넘게 아팠었지. 세월이 약이라고 체념을 배웠는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언니를 보며 나도 한시름 놓았었고. 형부자식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어 올라 와.
떠올리기도 싫은 아픈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해.

언니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있어.
가끔씩 언니가 우리 집에 놀러오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떨그럭거리는 언니 때문에 일요일에 늦잠 자는 이 서방이 마지못해 일어나는 것이 민망키도 했고, 입이 까다로운
이 서방 때문에 매 끼니때마다 새로운 반찬을 몇 가지씩 하는 나를 힘들게 한다면서 이 서방 흉을 볼라치면 혹시라도 들을까봐 언니의 주책에 조바심이 나서 빨리 가버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어. 그러나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해 주고, 메주를 가져와서 된장도 담가 주고,
고추꼭지를 따기 싫어 자루에 넣어 창고에 처박아두면 꺼내어 죄다 다 따서 방앗간에서 빻아와서 고추장도 담가 줄 때는 딸네 집에 다니러 온 엄마 같았어. 마늘도 까지 않고 그냥 매달아두면 일일이 다 까서 냉장고 속에 넣어주고 가던 언니에게 괜히 심술을 부리며 구석을 뒤진다고 퇴박만 주곤 했었지. 언니야. 잘 못했어. 언니가 며칠 머물다 가고 나면 집이
반질반질하게 깨끗해지고, 냉장고 안에서 마늘을 꺼낼 때마다, 또 고춧가루를 덜어낼 때마다
언니의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막상 입으로는 그 말을 뱉어내지 못했어. 전화라도 걸어
고맙다 는 말을 할 수 있었는데도...왜 당연히 언니가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지난 번에 우리 집에 다니러 왔을 때 나랑 같이 백화점에서 점퍼를 고를 때 나는 베이지 계통의 색깔을 권하는데 자꾸만 언니는 원색의 옷을 골라잡는 통에 환갑, 진갑 다 지낸
노인네가 빨간색을 어떻게 입겠느냐고 비아냥거려도, 기어이 내가 고른 옷을 마다하고
빨간 점퍼를 사 가지고 오면서 어렵게 운을 뗐었지. 오래 전에 혼자된 형부 친구가 언니
아파트 옆 통로로 이사를 왔다면서 같이 등산도 다니고, 서로 반찬도 나누어 먹기도
한다며... 혼자 살면서 아파트를 차지하고 사느니 언니 아파트는 세를 주고 그 영감님과
한 집에 살면 어떻겠느냐고.. 엄마가 재혼하는 기분이 들어서 싫었어. 언니랑 점심밥 상을
마주 놓고 앉아 담근 포도주를 마시면서 "너는 서방도 있고, 아들, 딸도 있으니 행복한 줄 알고 뭐든 참고 잘 살아라" 그 말을 하는 언니가 외로움을 타고 있다는 걸 왜 헤아리지
못했을까. 엄마처럼 언니도 남편이 죽으면 당연히 혼자 사는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다음날, 언니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퉁명스런 내 배웅에 언니는 죄인처럼 내 눈치를 살피며 기차를 타고 떠났어. 며칠동안 밥도 잘 안 넘어가고 언니 때문에 '죽어도 좋아'라는
비디오를 이 서방 몰래 빌려 보기도 했어. 예순이 넘어도 남녀간의 사랑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거든. 남한테는 말도 못하고 주말에 집에 온 만만한 혜은이에게 슬며시 이모가 사랑을 하나봐 했더니 대번에 "어, 우리 이모 너무 멋있다. 로맨스 그레이잖아.
이모가 외로워 보였는데. 잘됐다."  딸의 생각에도 못 미치는 내가 정말
부끄러웠어. 지난 어버이날에는 언니에게 꽃도, 선물도 보내지 않았는데 언니는 아마 눈치 챘을 거야. 내가 심통을 부린다 는 것을...정말 미안해. 차마 전화도 못하고 글로써 언니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언니의 사랑에 후원자가 될게. 아직 이 서방에게는 말을 못 했지만 때를 봐서 할까 해.

참 잇몸이 시리다고 했지? 윗집 할머니의 증상도 언니와 비슷한데 약을 먹었더니 나았대. 어떤 약인지 물어보고 사서 부칠게. 
언니야, 사랑해! 그럼, 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