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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자녀에게 식당에서 술을 권하는 부모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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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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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여자


BY 수련 2005-03-30

심야버스를 타고 앉으니 그제사 가슴이 진정이 되었다.
그러면서 발을 쳐다보니 신발도 없이 스타킹만 신은 발이
애처롭게 시려온다.
창가쪽 밑에 나오는 히터에 발을 갖다대니 조금 따뜻해졌다.
차츰 몸이 데워져 안정이 되자 유리창에 비친 얼빠진 내 모습이
너무 황당해서 갑자기 헛 웃음이 나온다.
'이게 무슨 꼴이람'
오밤중에 신발도 신지못하고 쫓겨나다니, 그러고보니 쟈켓 단추도
두개나 떨어져나가 옷매무새를 손으로 꼭 잡은 내 꼬락서니가
납치범에게 감금되었다가 필사적으로 탈출한 여자같다.

오늘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지?
차근차근 더듬어 생각해 본다.

주말에 딸애에게 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않아 미적거리다가 그냥 포기해버리고 우울한 주말을 보내고있는데
일요일저녁 7080희망콘서트에 간부직부인들이 다같이
가야한다는 김계장의 말에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허락을 구하니 흔쾌히 다녀오란다.
공연보는걸 좋아해서 콘서트나 연극,뮤지컬이 들어오면
보러 가자고, 아니 나라도 보내달라고 아무리 떼를 쓰도 어림도 없다.
테레비보면 된다주의이고 영화보러가자하면 비디오로 출시되면
보라는 바람에 한번씩 서울오면 꼽아놓았다가 딸애와 둘이서 다니곤 했다.
두말않고 허락해 주는 남편이 미심쩍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준비를 했다.

혼자 저녁먹으라고 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남편 마음변하기 전에 어서 나서야지.

386세대에 맞춘 대학가요제 역대 수상노래를 메들리로 각 그룹들이 나와
공연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나도 그 옛날 20대로 돌아가 일어서서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장단을 마추고, 몸도 흔들며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그때, 쟈켓주머니의 떨림이 느껴졌지만 무시한 채 계속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데 멈추었다 또 떨리고....
그 시간에 핸폰을 할 사람은 남편뿐인데 혼자 있기 지겨워 괜스레
마누라에게 전화질이나 하나보다했다.
아직 공연중이라는걸 알려주려고 핸폰을 열었다.
마지막 순서로 유열이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내가 좋아하는 노래)
를 부르는 중이라 노래에 취해 나는 유열의 옆에 서 있는다고 착각하는 중인데.

" 어랍쇼, 와이리 씨끄럽노. 야~ 거기 어데고 앙!" 혀가 꼬부라진걸 보니
만취상태인거 같다.
댑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한마디도 못하고 핸폰을 꺼버렸다.

순간 흥이 싹 가신다. 유열옆에 서있던 환상을 깨고 시계를 보니 9시 40분이다.
앞자리라서 빠져나가기도 힘들지만 남의 차에 얹혀온 터에 길도 몰라
혼자 빠져나갈 수도 없다.
해가 지면 바깥출입을 하지않는 오랜 습관때문에-워낙에 남편이 싫어해서-
불빛이 반짝이는 밤 외출에 익숙치 않지만 남편의 허락하에 나온 외출이라
마음놓고 흥에 빠져들었는데 전화가 온 뒤로는 좌불안석이다.

옆을 돌아보니 동행한 싸모님들은 나이도 잊은 채 무아지경에 빠져있고,
나만 정신이 번쩍들어 헛손뼉만 치고, 몸은 빳빳하게 굳어져만 갔다.
유열의 노래가 마지막이라 나갈 채비를 하는데 앵콜송을 청하는 박수는
그치지않고 , 연이어 또 노래가 나오고, 이번에는 기립박수로 또 앵콜송을 청한다.
'아이고 이를 어쩐다. 이제 고만하지.' 앵콜 박수치는데는 나도 만만찮지만
그 날의 앵콜을 청하느 박수가 왜 그리 원망스러운지.

세 번의 앵콜송을 마지막으로 공연은 끝이 났다.

밤 10시- 집에 도착하니 10시 30분.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
그래도 허락받은 외출이니 뭐 그리 대수일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코먹은 소리로 '영~감!' 하고 애교를 떨면 지가 별수있겠어.
그러나 그건 나의 오버된 착각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미리 부츠쟈크를 열고 문을 열자마자 신을 벗고
들어서는데 막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편의 눈과 일순 마주쳤다.

갑자기 눈빛이 바뀌면서 소리를 지르며
후다딱 뛰어나오는 남편의 갑작스런 떠밀림에 문 밖으로 밀려나왔다.
"당장 나가. 노래방까지 갔다와? 그렇게 니맘은 편하더나 앙?"
유열이 노래 부를 때 전화를 받았는데 아마 노래방이라고
착각을 했나보다.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바로 오지않고 여자들과
어울려, 아니 남자목소리가 남편의 머리를 획 돌게 했나보다.

"무슨 노래방은.. 공연중에 전화를 받으니 그렇지요. 마치자마자 바로 온거라구요"
"씨끄러워. 잔말 말고 나가. 잘난 니딸하고 한패거린줄 모리나? 작당해서 나를
골탕먹여놓고 니는 신이나서 노래방이나 댕기나?"

도대체 무슨소리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
늦은 오밤중에 복도에서 실랑이를 하면 아파트 통로 사람들이 알게되고
관사인줄 아는데 그런 창피가 어디있나 싶어 싸워도 일단은 집으로 들어가야지
있는힘을 다해 밀치고 들어가려는데 남편의 힘을 내가 어찌 당하리오.
밀고 당기고...끝내 신도 신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로 밀려나오고 말았다.

에이 모르겠다. 일층을 누르고 바깥에 나와서 올려다보니
아래 윗집 불이 켜져있다.

잘못하면 소문나서 얼굴도 못들고 다니겠다 싶은 마음에 일단은
물러서야지. 그런데 맨발로 어쩌지.자동차키를 들고 나왔으면
드렁크에 슬리퍼가 한 컬레 있어 그거라도신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핸드빽은 손에 쥐고있어서 다행이었다.(카드와 돈이 있으니까)
그 시간에 신발가게 문은 닫혔을텐데 어쩐다. 할수없지뭐, 맨발의 청춘으로 돌아가야지.
스타킹이 짙은 밤색이라 그나마 표가 덜 나기도 하다.

시계는 밤11시.
거제 터미널에서도 심야버스는 있겠지만 그동안 여러 행사에
참여했기에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만날수도 있으니 곤란하다.
[ 모 싸모님이 맨발로 헤메이다] 라는 기사가 거제 신문에
실릴수도 있겠다.
택시를 집어타고 30분거리인 통영터미널로 갔다. 거기는 아무도 모르겠지.
11시40분 심야버스가 있단다.

손님은 4사람. 대기실 의자에 앉아 발을 오무려 감추고 덜덜 떨면서
버스출발시간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이 다 타기를 기다렸다가
출발 5분전에 기사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틈에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달리는 버스안에서 곰곰히 생각했다.
'왜그랬을까. 그토록 화가 난 이유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 그렇구나!

금요일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이 맥없이 말을 했다.
"혜은이 의료보험이 나한테로 넘어왔어. 직원에게 일년간 해외 연수갔다고
둘러대긴 했는데 어째서 금방 그렇게 넘어오나? 참 빠르네"
선생한다고 남들에게 딸자랑을 얼마나 했는데 남편의 속앓이가 말이 아닐것이다.
"사실은 당신에게 말하기전에 2월초에 사표를 낼려고 교감선생님에게 갔더니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전에는 안된다고 하더래요. 미리 말을 해야 교육청에도
알리고 새학기에 반 배정을 안 받는다면서 걔가 교감선생님 전화를
바꾸어주대요. 할수없이 내가 허락했죠. 뭐"

그러니까 설에 내려오기전에 딸애와의 음모는 이미 시작되었었다.
오랫동안 지켜본터라 더이상 딸애를 말릴수가 없어 교감선생님께 딸애의 사표결정에
남편 모르게 독단으로 덜컥 동의를 하고나니
죄인처럼 몇날 며칠밤을 뜬눈으로 새고 밥알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딸애가 내려와서 직접 말하기전에는 남편에게
내색을 할 수가 없어 표를 내지 않았었다.

물론 딸애가 말하는 시점에 나도 아는걸로 하자고 미리 딸애와 짯던 것이다.
그런데 의료보험말이 나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실토를 했으니..
순간 남편의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라 여기고
그냥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나의 착오다.
원래 남편은 술을 먹지 않은 맨정신으로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잘 하지않는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평소의 나에 대한 불만이 봇물터지듯이
나오기에 웬만하면 책 잡힐짓을 안한다.


딸애의 층격적인 결정에 남편이나 나나 서로 겉으로는
평온을 찾은것 처럼 보였어도 속으로는
둘 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상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공연 보러가고 남편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생각하니
내가 꽤씸한 마음이 들었으리라. 모녀의 작당에 농락당했다고 여겼는지
술이 만취가 될때까지 먹고 보니 마누라가 생각할수록 꽤씸하고 또 꽤씸했으리라.
그런데 여편네는 공연이나 보러가고 밤9시가 넘어도 오지않지, 전화도 안받지,
몇번의 시도끝에 겨우 통화가
되었는데 느끼한 목소리의 남자노래가 들려오지 그러니 눈이 뒤집혀지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사람을 밀어내는법이 어디있남. 생각 할수록 황당하다.
강남터미널에 새벽4시에 도착해 누가 내 발을 볼새라 뜀박질을 해서 얼른 택시를
탔다. 뒷꼭지가 당겨 타고 밖을 내다보니 어떤 남자가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당신, 나 알아요? 나 모르잖아. 신경꺼시라구요.
맨발의 여자는 당당하게 기사에게 말한다.
"고양경찰서 앞으로 가입시더~"
"녜? 경찰서에 ?? "
내 옷매무새가 수상하게 보이는갑다. 자꾸 빽미러로 흘끔거린다.
"우리 아파트가 경찰서 앞이거든요"
"아, 예!"

신발도 없이 맨 스타킹 차림인 엄마를 자다가 일어나 문을 열어주며
놀랜 토끼눈으로 쳐다본다.
"야, 맨발로 다니니 억수로 좋네. 지압도 되고. 이참에 맨발로 다닐까부다.흐흐흐"
약간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흐흐거리는 엄마를 보는 딸아이가
기가 막히는지 아무 말도 못한다.
옷을 갈아입고 딸애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그리 웃음이 나오는지 내가 생각해도
꼭 실성한 여자같다.
"혜은아 오늘 공연 진짜 재미있대. 유열 알지? 니가 제일 좋아하잖아.
불꽃,하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를 마이크를 당겼다 놓았다 함시로 부르는데
너거옴마가 뿅 갔다아이가"
"엄마 이거 몇개야?"
손가락세개를 접어 흔드는 딸애를 끌어안고 흥얼거리며 선잠에 빠져들었다.

잠꾸러기인 딸애는 새벽 6시30분에 모닝콜소리에 잠이 깨고
주저없이 벌떡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그래도 밥은 먹여 보내야지.
떨어지지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손으로 벌려 아침을 차린다.
전기밥솥에 따끈한 밥이 있네. 전날 밤에 쌀을 씻어 밥을 해놓았나보다. 기특타.
갑자기 가슴이 시려온다.
'기집애, 그냥 선생이나하지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는지..'
"옴마요, 낮에 푹 주무세요. 지는 밤 12시에 집에 도착입니다"

지난 수년동안 메스컴에서 수험생이야기가 나오면,
먼나라 이야기인냥 그냥 건성으로 여기다가
막상 수험생이 되어 학원으로 가는 딸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어휴~

하루종일 이불속에서 뒤척이고 일어나니 그제사 온 몸이 쑤신다.
어깨도 아프고, 겨드랑이도 땡기고, 목도 아프고..
얼마나 용을 쓰고 밀고 당기고 했는지.
쫓겨나지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밀고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다 썼더니...

어제는 삼일절이라 딸아이와 마루에서 보일러 틀고,
온몸의 뭉쳐진 근육을 풀기위해 전기장판까지 틀어놓고 또 누워서 뒹굴었다.
테레비에서는 삼일절행사가 진행중이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오~ " 옛날 학교다닐때 열심히 불렀지.
기념행사의 노래는 죄다 외우는데 의외로 딸애는 하나도 모른단다.
오로지 공부만해서 배운적이 없다네. 참 망할놈의 나라다.

쌍커풀수술한 대통령의 안경 낀 눈이 코미디다. 그 부인도 했다던데.
잘되었으면 나도 해볼까싶은데 왜 여사의 얼굴이 안보여? 에이 씨,
미리 짰는지 카메라가 여사의 근처도 안간다. 안밖으로 다 쌍꺼풀 수술한 모습이
국민에게 비치면 원성을 들을까 두려운가?
"야. 혜은아. 엄마도 이참에 쌍꺼풀수술이나 할까?히히히"
" 엄마도 참내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요? "
"왜? 너거 아부지 팍 차뿌리고 쌍꺼풀수술이나 해서 새로 시집이나 가볼꺼나.히히히"

따르릉~

" 혜은아, 니가 받아라 너거 아부진가보다.
자기 흉 보는줄은 아는가보네.양반은 못되겄다."
"여보세요. 녜? 엄마요. 새벽에 오셨던데요. 심야버스를 타셨나봐요.
..............................아버지. 그만 하세요,
다 제 잘못이예요. 엄마 혼내지 마세요. 흑흑."


무슨말을 하는데 재가 울지?
" 아빠가 자꾸 그러시면 저 연락끊고 숨어버릴래요"
저놈의 기집애 뭐라카노. 저거아부지 속이 말이 아닌데.
얼른 전화기를 뺐았다.
"이미 엎지르진 물인데 담을 수는 없잖아요. 자꾸 애 한테 그러면
이은주처럼 그런 일 저지르면 우짤거예요?"
전화가 끊겼는지 조용하다. 아닌데? 신음소리가 들린다.
내가 너무 심하게 말을 했나. 며칠동안 테레비에서 계속 이은주의
자살뉴스에 혀를 차던 남편에게 충격적인 발언을 했나.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하고 나야 돌아서면 남남이지만 혜은이는 당신 딸이잖아요.
그러니 애한테 자꾸 그러면 나도 영영 내려가지 않을거라구요"
마누라의 반격에 한풀 꺾였는지 딸을 다시 바꾸란다.
"예, 예..훌쩍, 예....아빠 고맙습니다. 잘 할게요"
다시 전화기가 나에게 왔다.
"반찬이나 많이 맨들어놓고 내일 내려오너라. 흠흠."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안한다.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자도 모르고....
" ....알았구먼요"

나는 결국 마음 약한 여편네가 되고만다. 이대로 영영 쫓겨나면
어쩐대. 자리에 누워있어도 영감이 있어야 마누라 목에 힘이 들어가지.
돈 벌 능력도 없는 내가 버텨본들 무슨 수가 잇는것도 아니고,
남편이오라할때 못이기는 채 퍼뜩 가야지.
아이고 내 팔자야~

싱겁게 전쟁이 끝나고보니 뭔가 허전타. 칼을 뽑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칼집에서 뺄까 말까 망설이다가 도로 집어넣은 꼴이되었다.
어쩔거여 이게 다 내 팔자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