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덴마크 농민들에게 농업 탄소세 부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447

단편소설


BY 수련 2004-10-06


갈래 : 단편 소설
제목 : 벤자민에도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았는가!
성격 : 비극적, 희망적
시점 : 일인칭 주인공시점
주제 : 아이를 잃은 엄마의 절망, 남편의 외도에서 방황하는 한 여자가 베란다에서 자라는
키 큰 벤자민 나무에 열매가 열린 것을 보고 자신의 인생에도 다시 작은 열매가 맺힐 수 있다는 확신에  이미 마음이 떠난 남편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
등장인물
 나(정희) : 딸을 잃고 절망적인 몇 년의 세월을 남편의 외도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여자.
 영섭    :정희의 남편. 아내 외에 다른 여자에게서 안정을 찾으려는 남자.
 은영    : 정희, 영섭의  딸이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교통사고로 죽는다.
 성호    : 영섭의 친구

 

개요
 화자인 나(정희)는 결혼5년만에 겨우 임신이 되었지만 자궁 외 임신으로 실패하지만 남은 나팔관도 냉이 차있어 오랜 시간동안 치료하고 난 후에도 임신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였다. 그러나 꾸준히 산부인과를 다니며 치료를 하고 친정엄마의 성화에 절에서 불공도 드리고 그러다가 임신을 하게 된다. 딸, 은영이를 낳고 그후로는 더 이상 임신이 되지 않았다.
은영이도 예쁘게 잘 자라주었고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려나갔다.
은영이가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오토바이 사고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정희는 반쯤 정신이 나가고 남편 영섭은  헌신적으로 정희를 보살핀다. 그러나 정희는 심한 우울증에 몇 번의 자살을 시도하고 아내가 아닌 전혀 낯선 여자로 변해 가는 정희에게 조금씩 지쳐간다. 남편 영섭은 회계사 사무실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다니던 중에 새로 온 홀에서 음식을 나르는 딸 하나를 둔 과부의 친절에 언제부터인가 깊은 관계로 빠져든다. 저녁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집에 늦게 들어 가다보니 아내인 정희가 눈치를 채었고,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라는 사실에 정희는 남편에 대한 실망과 회의를 느낀다.  정희에게 못 할 짓 인줄 알면서도 과부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어느 날 화자는 벤자민에서 작은 열매 하나가 툭 떨어지는걸 보게된다. 열대성 식물인 벤자민이 열매를 맺은 걸 처음 보았다. '아! 열매가 맺혔다니..' 벤자민에게서 은영이가 오버랩 되면서 정희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아를 찾게된다. 결혼하자 손을 놓았던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되고 갈등하는 남편 영섭을 놓아준다.

 

 

 


건너편 아파트에 수험생이 있는지 두어 집만 불이 켜져 있다
시계 분침은 2시 20분을 지나간다.
불빛하나가 아파트로 들어오면서 주차할 때가 없는지 마당을 한바퀴 돌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남편이 모는 마티즈다. 다른 집과 달리 아내인 내가 그랜져를 타고 남편이 작은 차를 타고 다닌다. 딸아이가 고등학교가 버스로 여섯 정거장 되어 등 하교를 시켜주면서 남편은 나를 위한 건지 아이를 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를 바꾸어 타라고 했다.
엘리베이터의 땡 하는 소리가 들리고 딸그락거리며 문을 따며 남편이 들어서며
멍하니 베란다 끝에 서있는 나를 보더니 "어, 아직 안 잤어? 미안해, 손님이 늦게 와서 이야기하다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말없이 주방으로 가는 나에게 " 저녁은 먹었어. 그냥 미수가루만 한 그릇만 타 줘"
아무리 늦은 시각에 들어와도 사무실에서 출발하기 전에  전기밥솥에 스위치를 켜라고 전화를 하던 남편이 벌써 두어 달째 전화를 하지 않는다.
특히 밥에는 까다로워 식은 밥을 데워서 먹는걸 싫어하여 항상 갓 지어내어 구수한 밥 냄새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원하여 결혼 초부터 습관처럼 그렇게 했다.
그래도 아침은 항상  미수가루로 대신하여 그나마 번거로움이 덜하다.
미수가루를 타서 방에 들어가니 어느새 씻었는지 욕실에서 나오며,
"아, 피곤해, 요즘 친구들도 자주 찾아오고 쓸데없는 손님들도 왜 그리 많이 오는지.."
말꼬리를 흐리며 내 시선을 피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딸아이 방으로 갔다. 언제부터인가
당연한 듯이 남편은 나를 불러 세우지 않는다. 나는 허리가 좋지 않아 방바닥에서 자고 남편은 침대에서 자지만, 여느 부부처럼 한 달에 서너 번은 잠자리도 한다. 그러나  점점 뜸해 지면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두 달 전부터 아예 침대에서 등을 보이며 자기 시작했다. '저 남자가 내 남편인가?'
텅 빈 딸아이 방에 들어서니 벽면에 활짝 웃는 딸의 모습들에 울컥 울음이 치솟는다.
중학교 입학하던 날, 단발머리에 하얀 브라우스 위에 빨간 체크무늬의 조끼를 입고 기념으로 찍자하며 장난스레 웃었지. 옆 벽면에는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갈래로 머리를 묶고 두 손으로 턱을 받쳐들고 얼굴을 옆으로 기울며 한껏 포즈를 취해주는 사진이다.
걸음마를 하면서 치마만 입혔었는데 어쩌면 그리도 앙증맞았는지 내 딸이지만 정말 예뻤다.
"엄마! 이렇게 할까? 아냐 손을 이렇게 해야지"  유난스레 애교가 많았었지...
아이의 책상 유리 밑에도 은영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찍은 사진이 엄마마음을 아는지
맑게 웃고 있다.
"은영아!... " 찬 유리를 만지는 손등에 눈물이 떨어진다. 언니와 엄마는 도배하듯이 온 방에 붙혀진 사진을 보며 이제 그만 사진을 떼어 내라 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이 방에서 은영이와 나는 지금도 항상 같이 살고있으니까.
불을 끄고 누워 위로 보니 천장 한 쪽이 환하다. 이 방을 은영이 방으로 정하자 은영이가 학교를 파하고 오면서 문방구에서 사온 스티커를 붙이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가도 키가 닿지 않아 내가 다시 안아주며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들이다.
 큰 별, 작은 별, 천사, 새도 있고, 초생달도 있다. 불을 끄고 누워있으면 한참동안이나 불빛의 효력이 떨어질 때까지 푸른빛을 낸다.  하얀 날개를 단 천사가 되어 새를 친구 삼아 별과 달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잘 살고 있겠지. 귓속이 축축해진다.
 몸을 옆으로 돌려 잠을 청해보지만 오늘도 허탕 일거라는 예감이 든다. 한동안 약에 의해서만 잠을 잘 수 있다가 겨우 약을 떼고도 토끼잠이라도 잘 수 있었는데 남편의 귀가가 차츰 늦어지고 남편의 행동 하나에 신경이 쓰이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도 억지로 눈을 감아본다.
꿈속인가,  "엄마! 오늘은 친구들이랑 같이 호수공원에 갔다가 갈게. 우리 반 애들이 힙합 댄스 경연대회에 나가는데 응원하러 가야돼" "마치면 전화해. 데리러 갈 테니까" "아냐, 버스 타고 갈래."
결혼 후 첫 임신은 자궁 외 임신이었다.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되어 전기밥솥에 스위치를 올리고 가스 불에 찌개를 올리고 식탁을 닦는데 갑자기 배 안에서 뭔가 찌르는 것 같더니 저절로 비명이 나면서 주저앉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마침 남편이 들어와서 병원으로 실려갔다. 나팔관속에 냉이 차있어서 수정란이 자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나팔관에서 착상되어 수정란이 점차 커지면서 좁은 나팔관이 견디지 못하여 터져 버리는 바람에 찢어질 듯한 통증과 배속에는 피가 흥건히 고이게 되어 대 수술을 해야만 했다. 
 한쪽 나팔관을 잘라내고 한쪽 나팔관만 남았는데 그쪽도 냉이 많이 차있어서 수정란이 자궁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나팔관에 착상하기 쉬울 거라는 의사의 말에 5년 동안이나  산부인과를 내 집 드나들 듯이 하며 냉 치료를 하였지만 임신의 소식은 없었다. 친정엄마의 성화에 절에 불공도 드리러가고 이곳 저곳 용하다는 한의원을 다니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꼭 쥔 아이의 손가락을 펴면서 신기한 듯 쳐다보는 나에게 남편은 딸 하나면 족하다며 그만 낳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은영이를 낳고  피임은 생각도 안 했지만 은영이의 키가 훌쩍 자랄 때까지도 임신 소식은 아예 없었다.
 세상에서 내 핏줄을 타고 난 하나 밖에 없는 천금같은 내 자식인데.... 생각하기도 싫은 4년 전 일들이 비디오 테잎의 빨리 감기처럼  소리 없이 지나간다.
 그 날따라 버스를 타고 집에 오겠다는 은영이 대신 일산 경찰서에서 전화 한 통화.... 분식 집 배달하는 남자아이의 오토바이에 치여 병원에 실려갔다는 말이 귓속에서 웅웅거릴 뿐 그 뒤의 일들을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가 돼 버렸다.
"여기는 고양 경찰서인데 김 은영 학생 집입니까?"
 "녜.."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아팠다. " 지금 병원으로......"  귀에서 계속 웅웅거리기만 할 뿐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여보세요...은영이 어머니 세요? 여보세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1번을 눌렀다.
은영이가 아파트로 이사 온 첫날에 제일 먼저 아빠 은행사무실 전화번호를  1번으로 입력을 시켜놓았었다. 그 다음에 지가 좋아하는  고모 집은 2번 이모 집은 3번....
"여보..은영이가...고양경찰서에..." 의식이 깨어 눈을 뜨니 눈물범벅인 언니의 얼굴이 보인다.
"언니. 무슨 일이 있었어? 은영이에게 무슨 일이.... 말해봐. 응? 은영이 어디 있어?"
언니를 밀치며 일어서다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안돼, 절대로 안돼, 은영이 어디 있어?" 팔에 꽂힌 주사바늘을 거칠게 빼서 던지면서 팔에  링그 병이 달린 쇠막대가 걸려 넘어지면서 병원바닥에 유리조각과 액체가 흩어졌다.
"정희야, 제발 이러지마. 정신 차려, 김 서방이 은영이하고 같이 있으니까 네 몸부터 추스리고 은영이에게 데려다 줄게" "싫어 지금 갈래. 언니, 은영이에게 아무 일 없는 거지? 응? 말해봐 어서..."  언니는 나를 껴안고 "어떡하니, 니가 불쌍해서 어쩌니" 하며 그냥 울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일산 병원에 내려 응급실 쪽으로 뛰어가는 나를 언니는 붙잡으며 "정희야. 그쪽이 아니야." "그럼 어디...." 풀석 주저앉는 나를 안고 언니는 또 운다. 흐릿하게 남동생이 보이고 시누이가 보인다. 은영이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도 보인다. "은영아! 은영아!..."

친구들과 힙합 댄스 경연대회를 보고 건널목에서 빨간 신호가 깜빡거리자 아이들이 차도로 내려섰고, 미처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분식 집 배달하는 남자아이가 탄 오토바이가 급하게 좌회전을 하다가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은영이를 치었고, 은영이는 차도로 넘어지고  막 신호가 바뀌어 차들이 달려오는 엘란트라 승용차에 받쳐 병원에 바로 옮겼으나 머리가 땅에 부딪혀 피가 흥건하게 고여있었고, 심한 타박상을 입어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단다.
오토바이를 몰던 아이도 오토바이와 함께 몇 바퀴를 돌다가 인도로 떨어져 나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중태라고 했다. 은영이 친구들에 의하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단다.
벌써 4년째 접어들었다. 지금쯤 대학생이 되어 있을 건데... 하루 일과를 친구에게 말하듯이
문에 들어서자마자 재잘거리는 은영이였는데.....
 천장에서 빛을 내던 별도, 달도 천사도 잠들었나보다. 적막 속에 벽에 붙여진 은영이의 웃는 얼굴만 잠들지 않고 나와 함께 하고 있다.
몸무게가 무려 10키로가 빠지면서 어느 날, 거울 속의 낯선 여자하나가 쾡 한 눈을 하고 마주서 있는데 남편의 표현을 빌리면 한마디로 해골이다. " 제발 뭘 좀 먹고 잠도 잘 자봐. 당신 꼴이 어떤지 알아? 해골 같아." "당신은 밥이 잘 넘어가? 잠이 잘 와?" " 은영이가 당신에게만 딸이야? 나에게도 예쁜 딸이었다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남편도 나도 은영이 이름만 입에 올려도 목이 메인다. 4년이나 흘렀는데도.....  .그 동안 남편이 나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알면서도 괜한 악다구를 쓴다.
나의 심한 우울증에 몇 번의 자살을 시도하면서 남편도 점차 지쳐갔다. 친정식구들도 나에게 지쳐갔다. 이래선 안 되는데...
밖이 뿌옇게 밝아온다. 또 밤을 새웠다. 누워서 뒤척거리니 허리만 아파 일어나 베란다로 나왔다.. 아파트 앞 동과의 거리가 좁아 베란다에 나무를 많이 놓아두었다. 커튼을 내리면 갑갑하여 스칸다버스, 아이비도 늘어뜨리고 키 큰 고무나무도 잎이 넓어 알을 가려주는데 한몫을 한다. 연산홍도 해마다 봄이면 붉은색, 분홍색, 주황색 여러 가지 꽃을 피운다.
이사올 때 시누이가 사다준 관음죽도 8년이 흐르면서 제법 굵직해졌다. 벤자민은 천장에 닿는다. 은영이가 초등학교 오 학년때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처음 입주하는 아파트라 입구에 화초, 꽃,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파는 차가 내내 서있었다. 잎에 하얀색이 조금 섞인 벤자민이 은영이 키와 비슷했다.
"은영이 하고 벤자민하고 누가 더 빨리 자라나 시합해볼까?" 남편은 한쪽 눈을 찔끔하며
나에게 사도 되겠지 하는 신호를 보냈다. 남편의 손에 들린 벤자민이 베란다로 옮겨지면서
벤자민은 제일 앞줄에 자리하고 은영이는 장난스레 아침마다 키 재기를 하곤 했다.
그 벤자민이 8년이란 세월 속에 베란다정원에서 수장처럼 제일 키가 크다.
 식물의 자람과 사람의 자람을 어찌 비교 할 수 있을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벤자민이 은영이보다 조금 더 크더니 그 후부터는 은영이는 심통이 나서 아예 키 재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가 거름을 너무 많이 준거 아냐? 씨. "
"나무도 영양분이 있어야 자라지 안 그러면 시들해져서 죽어" 봄이 되면 분갈이하면서 거름도 주고 화분도 갈아주었지만 키가 커지면서 힘에 부쳐 분갈이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은영이가 가고 난 뒤부터는 물만 주었는데도 키가 자꾸자꾸 자라나 보다.
은영이의 존재만 보이지 않을 뿐 지금도 여전히 은영이는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은영이의 사고 후에 몽유병자처럼 이슬에 옷이 흠뻑 젖은 채 집에 들어와서 말없이 쓰러져 자고, 두 번의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병원에 실려가고, 신경정신과에 몇 번이나 입원을 되풀이하면서 남편은 차츰 나에게 지쳐갔다.
본인도 힘든 상황에서 방황하는 나는 쳐다보기에 자신도 견뎌내기 힘들었으리라. " 제발 저녁 때 밖에 나가지마. 당신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말야" 언제부터인가 드러내놓고 짜증을 내기시작 하면서 퇴근시간도 차츰 늦어졌다.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자는 남편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슬그머니 돌아누우며 내 손을 빼내버린다. 징그러운 송충이가 닿는다고 여길까. 남편의 맨살에 소름이 돋는걸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둘 다 소리 없이 누가 정하기나 한 것처럼 나는 은영이 방으로 이불을 옮겼고 남편은 안방침대에서 평온하게 잠을 자는지 아침에 식탁에서 마주쳐도 안방으로 건너오라는 말 한마디도 않았다.
베란다에 커튼을 달았다. 화초가 많아 굳이 커튼을 치지 않아도 맞은편 아파트에서 집안이 드려다 보이지 않을 거라 여겨서 그냥 두었는데 밖이 어둑해지면 가두어놓은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못하며 가디간을 걸치고  아파트의 끝에 있는 공원을 기점으로 해서 상가 쪽으로 돌다가 다시 돌아서 공원에 가서 벤치에 앉아 머리 속이 텅 빌 때까지 앉아 있다가 오곤 했다. 아무 무늬가 없는 두꺼운 광목 천으로 커텐을 달았다. 오후 5시가 되면 미리 커텐을 쳐버리고 테레비를 크게 켜놓고 백치가 되어 쇼파에 앉았다가 누었다가 그대로 잠이 든다.  도둑고양이처럼 발뒤꿈치를 들고 들어오는지 아침에 나는 쇼파에서, 남편은 안방침대에서 아침을 맞는 날이 허다했다.
그러나 서로가 무언극을 공연하는 것처럼 말없이 나는 미수가루를 타고 남편은 후루룩 마시고 "갔다 올게" 앵무새처럼 아침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집을 나섰다. 며칠 전, 자다가 꿈에 놀라 잠이 깨었다. 안방 문을 열어보니 남편 영섭은  자궁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태아처럼 이불을 끌어안고 자고있었다. 화장대위에서 파란 불이 깜박거려 무심결에 집어 들어보니 핸드폰이다. 뚜껑을 열자 깨알같은 글자들이 춤을 추며 눈을 찡그리게 한다.
'여보, 잘 들어갔어? 이상하게 잠이 안 와. 또 보고싶어지네. 잘 자, 사랑해~'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침대 위를 보니 남편은 그대로다.
마루로 나와 번호를 적어놓고 화장대위에 다시 핸드폰을 갖다놓았다.
이가 딱딱거리며 부딪힌다. 손도, 다리도 몸도 떨린다. 누가 '여보' 란 말이지? 잘 못 들어온 문자인가? 다시 소리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집어들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전화 부를 누르고 최근통화를 눌렀다. 011-3522-**** 같은 번호가 여러 번 찍혀있다.
번호에 확인을 누르니 '정임'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오전 10시20분. 두 번 째 통화 11시53분,  세 번 째 1시34분, 네 번 째 통화 4시 46분, 다섯 번째 오후11시 24분.... 문자를 확인하니 오전1시17분, 시계를 보니 1시 25분이다. 하루종일 이 여자와 통화를 계속한단 말인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면서 머리가 지끈거리며 무중력상태로 몸이 떠있는 것 같다. 돌아누운 굽은 남편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며 핸드폰을 남편 옆에다 던져놓았다.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내 눈은 눈병이 난 것처럼 빨갛게 보이는지,  "당신, 또 잠을 못 잤어?" 아무 것도 모르나 보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말없이 미수가루를 마시고 빤히 쳐다보는 내 눈길을 외면하며 앵무새처럼 갔다올게 하며 문을 닫는다.
 '정리를 해보자' 두 달 전부터 점점 퇴근 시간이 늦추어지고 말도 줄어들었던 같다. 평범한 은행 대리인 남편이 시간외 근무를 바쁘겠지 하며 예사로이 여겼던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속옷을 언제 갈아입는지 양말을 신는지 벗는지, 와이셔츠를 건네 준 기억이, 넥타이를 골라준 기억이 아스라하다. 습관적으로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개어 제 자리에 넣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살았었나 보다. 은영이의 사고 후에 남편 영섭의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계의 바늘이 11시 40분을 가리킨다.
 남편이 근무하는 은행전화번호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러고 보니 대출계에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지? 4년 전인데.. 은행은 일년마다 부서를 옮기는데 지금은 어느 부서인지도 모르겠다. 은영이가 사고를 당한 그 직후부터 나의 기억은 멈추어 버린 것이다.
 4년 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안내 114를 돌려 **은행의 전화 번호를 물어본다. 남편의 이름을 대며 바꾸어 달라고 하자, "외환계 대리 김영섭입니다."  "저예요" 갑자기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놀란 목소리로 당신이 어쩐 일이냐 고 묻는 남편에게 점심시간에 은행으로 나가겠다고 하니 더듬거리며 옆 건물에 있는 회계사인 친구 성호와 약속이 있단다.
놀랬을 것이다. 내가  4년 동안 은행으로 전화 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남편과 전화를 끊고는 오후4시쯤 성호에게 전화를 했다.
성호! 그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나와 막역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구라고 할까. 대학 2학년 때 미대의 한 행사로 교내에서 초상화 그려주기를 했다. 그때 내 앞의 모델이 성호였다. 남자애치고는 유난히 얼굴이 하얘서 병자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장난스레 웃음기를 머금고 팔장을 끼고 한쪽 다리를 올리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성호를 빠른 뎃생으로 스케치를 해서 종이를 내밀었더니
"우와~ 이렇게 멋있게 그려주다니, 맨입에 가져 갈 수가 없는데..." 됐다며 웃는 나를 보고는
그럴 수는 없다며 다음 여학생을 다 그릴 때까지 멀찌감치 서서 나를 지켜 보고있었다.
나는 네 사람을 그려 임무완수를 했고, 이젤과 화구들을 챙기려고 일어서는데 성호가 다가와서 " 같은 이 학년이니 말을 놓아도 되겠지? 공짜로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거들어야지" 어린아이처럼 천연스럽게 웃는다. '경제학과 이 학년 박 성호'... 하며 손을 내민다. "나는 서양화 전공이야" " 하하하~ 미래의 서양화가 ???" "서 정희" " 아, 정희..."
이름이 정겹다며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렇게 성호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성호는 다른 대학 경제학과를 다니는 제일 절친하다는 영섭을 소개 시켜 주었다. 대학로에 있는 카페에서 인사를 하는 영섭은 성호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컸다.
" 김 영섭입니다" 하며 내 손을 꼭 쥐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압도하였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손을 빼내며 뒷걸음을 쳤고, 갸우뚱하는 나를 안다시피 하는 포즈가 되었다.
그 후로 영섭을 만난다는 핑계로 우리 학교로 자주 들락거리며 미술 실에까지 들어와서는
이소룡 같은 포즈를 취하며 자신을 그려달라고 했다.
그런 영섭을 성호는 이상하다할 만큼 한 걸음 물러서서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힘이 센 친구에게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양보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쪽으로 비껴 선 성호의 안타까운 눈을 느낄 수 있었다.
 성호는 혼자 나에게 오면 조심스레 내 손을 잡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섭과 같이 있는 성호는 한없이 나약해 보였고, 동생을 배려하는 것 같은 형의 모습이었다.
어떤 때는 그런 성호가 미워 일부러 영섭의 팔짱을 끼기도 하고, 다리 아프다며 업어 달라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외면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걸 알 수 있었다.
한번은 학교식당에서 마주친 성호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영섭에게 쩔쩔 매는냐 고..
말없이 밥을 먹고는 밖을 나가는 성호를 뒤따라 나갔다. 벤치에 앉혀 놓고 다그쳤다.
성호의 아버지는 회사 사장이던 영섭 아버지의 운전기사였고, 영섭의 별채에 살고있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면서 영섭은 성호를 운전기사의 아들이 아닌 친구로 대해주어 둘의 관계를 다른 아이들이 전혀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친했다.
영섭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액 과외를 받았지만 3학년에 올라가서도 성적이 오르지 않자 영섭 스스로 과외를 끊어버리고, 성호에게 공부를 같이 하자고 하였고,  3학년 내내 둘은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영섭의 방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였다.
동생이 둘이나 있는 성호는 차마 대학 간다는 말을 못하였지만 아버지 또한 공부를 잘하지만 사장집에 얹혀 사는 자신의 작은 수입에  아들의 눈치만 보며 은행에 들어가라고 슬며시 떠보기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영섭의 아버지도 성호와 영섭이가 같이 공부하는 것을 알고, 성호의 대학 등록금을
대 주겠다고 말했고, 성호의 아버지도 차라리 그렇게 라도 아들이 원하는 대학을 가게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성호는 Y대 경제학과에, 영섭은 H대 경제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영섭의 아버지는 성호의 등록금은 물론이고, 25평 짜리 아파트 한 채까지 받았다.
서로 다른 대학을 다녀도 둘은 자주 만났고, 겉으로는 친구이상의 다른 상하관계는 전혀 없는 것같이 보였지만 영섭과 성호를 만나다보니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높낮이가 보이는 것 같았었다. 성호는 나에게 영섭을 소개시켜주면서 분명히 여자친구라고 했는데도 영섭은 나에게 친구이상으로 접근했지만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성호는 그 접근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런 성호가 너무 나약해 보여 나도 짐짓 모르는 채 영섭과 어울렸고, 졸업 후 결혼까지 가는 계기가 되었다. 영섭과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의 성호의 슬픈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영섭은 아버지가 거래하는 은행으로 들어갔고, 성호는 회계사시험을 쳐서 합격하여 우리가 결혼하고 3년 후에 조용하고 귀엽게 생긴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둘 다 만나면 서먹하긴 했지만,  은영이의 사고 후 은행의 점이 성호의 사무실근처에 있는 지점으로 발령이 나자, 둘은 예전의 절친한 친구로 돌아갔다.
 은영이의 사고 후에 내가 병원을 수시로 입원했을 때 한번도 빠지지 않고 와서  글썽이는 눈을 하고는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성호 역시 뜻밖의 내 전화에 놀란 목소리다. "웬 일이야? 별일 없어? 그런데 전화를 다하고 무슨 일이 있어?"
 "아니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니? 그냥 ...." 느낌이 이상하다.
성호의 떨리는 목소리가...  퇴근하면서 우리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계속 남편의 퇴근은 자정을 지나서야 집에 들어오니 오늘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성호는 남편이 늦게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나보다. 감색양복 안의 하얀 와이셔츠가 눈이 부신다.
블루바탕에 붉은 줄무늬가 있는 넥타이가 하얀 성호의 얼굴과 잘 어울린다.
"저녁 안 먹었으면 시켜" "아니, 그냥 커피 마실래" 밤에 잠을 못 잔다는 것을 남편에게 들었는지 쟈스민차를 시켰다. 입을 꼭 다문 나의 굳은 표정에 내가 뭘 물어보고 싶어하는지 이미 아는 것 같다. 나에게 꼭 알려주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망설이지 않고 형사앞에서 자백하듯이 술술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은행 옆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홀 서빙을 하는 여자인데 그리 예뻐진 않지만 남편을 편하게 해주는 것 같단다. 그리고는 "예뻐지는 않아. 그냥 평범한 아줌마야.
고등학생 딸이 하나있는 과부라고 하던데.. 식당 주인 아줌마의 조카인가 봐.
남편이 몇 년 전에 간암으로 죽고, 치료비 때문에 집과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날리고 살기가 딱해서 식당 일을 도와주면서 겨우 딸을 공부시키고 있는 것 같아"
성호는 아예 내 입에서 더 묻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줄줄 이야기를 다했다.
찌개냄비를 들고 가다가 남편의 바지에 쏟는 바람에 그 여자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고, 그 후부터 남편이 밥을 먹으러 오면 커피도 자판기에서 빼지 않고 원두커피를 내려서 가져다주곤 했단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성호는 괜찮으냐 면서 남편을 너무 욕하지 말란다. 그 동안 남편이 너무 힘들어했단다. 몇 번의 수면제 사건으로, 밤마다 몽유병자처럼 밤이슬을 맞는 아내를 보며, 정신 신경과를 수시로 입원했을 때 남편은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었다. 명일암 절을 다니면서 넉 달 전부터 더 이상 정신과의 약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밖을 나가는 횟수도 차츰 줄어들어 일주일에 두 번으로 줄어들었고, 남편도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눈치가 보였다. 내가 남편의 기운을 다 빼 버렸을까.
 아이러니하게 내가 마음을 잡자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다.
재작년에 시아버지가 경영하던 목재 공장이 부도가 나면서 시아버지는 쓰러져 돌아가셨다.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빈 털털이가 되어버렸지만 은영이 때문에
엉망이 된 우리 집으로 오시지는 못하고, 시동생 집으로 가 계신다.
가끔씩 들리는 시어머니는  꺼칠해지는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혀를 차며 언제까지 그럴거냐며 노골적으로 자식을 잡아  먹더니 이제는 남편도 잡아먹겠구나 악을 쓰며 한바탕 소동을 부리는 바람에 남편은 어머니를 달래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치기도 했겠지. 집에 들어오면 해골 같은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는 아내를 쳐다보는 것도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편하게 기대고 싶어 돌파구를 찾으러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문이 열리는 줄도 몰랐다. "왜 아직도 안자고 있어?"
12시 25분이다. 말없이 쳐다보는 나에게 "요즘 감사 때문에 계속 늦어지네" 피곤 한 듯이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마루 불을 끄고 안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화장실의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씻고 나오는 남편 앞에 서서 이야기 하자며 마루로 데리고 나왔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주춤거리며 다음에 하자며 도로 방으로 들어가는걸 막으며
"여보, 당신 여자 있어?" 단도직입으로 묻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 변명도 하지 말고 거짓말도 하지마. 그냥 대답만 해줘" "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어?" "그냥 대답만 해"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밀치며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꽝 닫는다.
나쁜 일을 하다가 도망 갈 구멍도 못 찾고 들키면 너무 무안해서 이불 속으로 숨어버리는 아이처럼 영섭은 몇 일 동안 아내인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계속 영섭은 자정이 넘어서 들어왔고, 독을 품은 여자처럼 서설이 퍼렇게
눈을 치켜 뜨는 나를 외면을 하더니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외박을 했다.
남편은 더 이상의 변명 따위는 하지 않고, 자신의 의무만 충실히 하는 강아지 마냥
관성법칙처럼 집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나도 더 이상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아니 체념이라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싱싱하게 자라는 화초를 보다가 작은 열매 두어개가 떨어져있는 것을 보았다. '이게 어디서 떨어졌지?' 키 큰 벤자민, 관음죽, 소철, 고무나무가 있지만
열매가 달리는 그런 나무는 아니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을 뻗어 나무들의 줄기를 만지자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진다.
베란다에서 제일 키가 큰 벤자민에 콩 알 같은 작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벤자민에 열매가 달린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은데....'
넋을 읽고 벤자민을 바라보는데 내 안의 뭔가가 소리치는 것 같았다.
'너 자신의 일을 찾아라. 남편을 놓아주어라. 영섭도 할만큼 다 하지 않았느냐.'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아 어지럽다. 냉장고를 뒤져 찬밥을 전자렌지에 넣어 데우고
반찬 통들을 열어보니 무슨 반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게 말라있다. 언제 요리를 했던지 기억에도 없다. 말라빠진 김치 몇 조각이 유리그릇에 붙어있었다. 언니가 담가 준 김치 통을
꺼내어 한 포기를 잘라 식탁에 놓고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래, 이제 남편을 놓아주자,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어, 자기도 힘들었을 거야. 은영이는 나만의 딸이 아니라 영섭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인데 자긴들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까.
그런데 마누라까지 4년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 메 이고 있으니 지칠 만도 했겠지. 그렇다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 아니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하필이면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를..그것도 아이까지 딸린 과부를.'
영섭을 이해 해 줄려고 하면 할수록 명치끝이 저려온다. 왜 하필이면.....
대강 설거지를 해놓고 작은방 붙박이 장 속에 있는 화구와 이젤을 끄집어냈다.  결혼하면서 접어두었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이 접어진 이젤을 펴고
캔버스를 올려놓고 붓을 들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탓일까. 물감도 말라 하나도 쓸 수가 없다.
"엄마, 지하에 세든 사람이 나간다더니 나갔수?"
"내일 모레 나간다는 구나, 왜 그래? "
"으응, 나 거기에 화실 만들고 싶어서 그래요. 그림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아이고 그래, 생각 잘했다. 진작에 그럴걸.."
엄마의 환한 목소리에 덩달아 힘이 실려 모아두었던 그림들도 끄집어냈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오늘은 일찍 들어오면 좋겠어, 할 말이 있어. 또 늦을 것 같으면 내가 은행 앞으로 나갈까?" 아무 감정이 없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내 전화가 당황스러웠는지 알았다며 일찍 들어온단다. 몇 달간의 냉전은 은영이의 죽음과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괴롭혔다. 더 이상 나를 학대하기 싫다. 화원의 아저씨조차도 벤자민이 열매를 맺는걸 본 적이 없다는 그 한마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 집 벤자민나무가 맺은 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자서 억지로 해석했다. 은영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이제 그만해, "

남편이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고 했던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내 모습에 적잖이 놀래는 표정의 남편에게 환하게 웃으며
씻고 오라며 싱크대로 돌아서는 내가 딴 나라에서 온 것처럼 착각이 되나보다.
"오늘 무슨 날이니? 당신 왜 그래?"
"그래, 오늘은 내가 다시 태어나는 날이야"
오랜만의 마주하는 밥상이다. 예전에 남편이 좋아했던 무말랭이 무침과
깻잎장아찌, 콩나물과 무를 같이 넣어 한 소쿰 김을 내어 양념을 한 나물도 좋아했지.
가스렌지에서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려놓고 여러 잡곡을 섞은 밥을 펐다.
로션을 바르며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 남편의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어서 먹어. 오랜만에 반찬을 만들었더니 좀 서툴러. 그래도 솜씨는 여전할거야."
된장찌개를 떠먹으며 " 당신 솜씨 변하지 않았네, 그런데...??"
"아무 말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나중에 차 마실 때 얘기해 줄게"
자못 궁금해하는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고 이것저것 맛있게 반찬을 집어먹는 영섭을 보니 내가 그 동안 너무 했구나 싶다.
"원두커피를 내려줄까? 당신은 모카에 헤즐럿을 섞어 내리면 향에, 맛이 좋다고 했지?"
"그냥 아무거나 줘, 귀찮은데 인스턴트로 줘도 되고.."
"오늘 마트에 가서 알갱이를 샀어. 금방 갈아서 내리면 훨씬 구수해"
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지 텔레비젼을 켠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텔레비젼을 껐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으니 보지마"
" 나 이제부터 그림을 다시 시작할거야. 엄마네 지하가 비었다 길래 내가 화실을 만들거라
했더니 엄마도 대 찬성이었어." "어, 그래 생각 잘 했어"
남편은 의외이지만 내가 다시 그림을 그린다는  말에 좋아했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 방으로 뒤따라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직은 남편에 대한 서운함보다 왜 그런지 가까이 다가서고 싶지가 않다.
처음의 불꽃같은 분노는 사라졌지만 나를 다시 찾았다는 기쁨과 더 이상 남편을 나의 자리에 끼워 넣고 싶지가 않아서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모르겠지만 일단은 남편에게 나의 일어서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다. 이미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 가버린  마음을 다시 주어 담고 싶지가 않다. 
나의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으로 그에게 또 다른 희망을 안겨주기 싫다.    왜?

베란다에 떨어진 벤자민 열매를 주어다가 유리그릇에 담아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