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환이 무작정 길을 걷는다.
갈 곳이 있다.
혜 란.....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
자신을 믿어주던 여인.
그러나 병환은 갈 수 없다.
병환에겐 아직 수 현이 마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난 세월은 병환을 변하게 만든 것은 혜 란 이다.
조금씩 혜란을 생각하는 마음이 늘어간다.
외로운 탓일까. 육신과 영혼이 지친 탓일까.
지난번 그녀를 찾았을 땐 외로움에 너무 힘이 들었을 때였다.
다시 돌아갈 기약조차 없는데 왜 혜란에게 마음을 주고 왔을까.
그녀에게 기다릴 이유를 주고 온 것은 무슨 마음에서일까?
수 현이 떠난 지 이제 2년이다.
단 한번 수 현을 안았었다. 그것도 무의식중에.....
그것을 나는 사랑이라 한다.
나는 수 현을 정말 사랑하는가.
정말 사랑했는가.
어쩌면 스스로 다짐하는 것은 아닌가.
내겐, 왜 내 인생이 없는가.
늘 먼저, 그들이 내게로 다가와서 마음을 주었다.
그들이 내게 마음을 주었기에 병환도 마음의 문을 열 때면 모두 떠나버린다.
그렇게 지금껏 살아왔다.
첫사랑도, 아내도 ,수 현도......
그렇게 다가왔지만 이젠 모두 떠나고 혜란만 남아있을 뿐이다.
춥다, 잔뜩 웅크리고 잠든 병환에게선 예전의 모습이 없다.
몹시 야위었고 이마엔 고뇌의 표상처럼 깊은 주름이 새겨있고 감은 눈 주위엔 피부가
벗겨져 가고있어 까맣게 타버린 얼굴은 40이 훨씬 넘어 보여 누가 이 사람이 예전의
병환인가 믿을 수 없게 한다.
숨쉬는 소리가 힘이 들어 보인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가.
몹시 고통스러운 얼굴로 무언가 중얼거린다.
꿈 안에서 누군가 여인 하나 웃고있다.
웃는 얼굴에서 여인은 뜻밖에 울고있다.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병환으로서는 모르는 사람인데 그는 여인을 붙잡으려 하고있다.
그러나 여인은 자꾸만 멀어져가고 병환은 그것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붙잡아야할 절대적인 명분이라도 있는 듯 필사적이다.
겨우 여인의 옷자락을 잡는 순간 여인의 모습은 간 곳이 없다.
놀랍고 허무 한마음에 소스라쳐 눈을 뜬다.
추워 웅크렸던 병환의 이마엔 땀이 흐르고있었다.
아침이다.
아침부터 하늘이 비가 올 듯 잔뜩 흐려있다.
비가 오면 좋겠습니다
억수 같은비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눈에 흐르는 물이
눈물이 아닌 듯
그리 보일 수 있는
그런 비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산을 내려오는 병환은 요양원에 근무하는 친구 성진이 가르쳐준 수 현 어머니의 친척
주소를 찾아갈 것이다.
이젠 병환은 지쳐있다.
지난 2년은 병환에겐 하루 하루를 수 현의 어머니를 찾는 희망과 절망을
넘나들며 지낸 나날이었다.
산밑 작은 개울에서 얼굴을 씻으려 잠시 앉은 병환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참담함에 미칠 것 같다.
뿌리치듯 물을 흩어놓고 대충 얼굴을 씻은 병환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혜란은 창가에 앉아있다.
창가엔 낮은 야산이 바라보이고 그 산 아래쪽엔 제법 너른 시냇물이 흐르고있다.
꽤 넓은 정원에 작은 나무들이 있고 정원 곳곳엔 작은 조각들이 있다.
그 작은 냇물과 맞닿는 곳엔 가마에 구운 기와가 얹혀 있는 작은 정자가 있어
호젓이 차를 마시기에 좋을듯하다.
문득 자신의 치마 자락을 잡는 작은 손길에 혜란은 살포시 웃음을 지며 내려다본다.
작은아이, 병환을 닮아 있었다.
혜란은 아이를 안으며 집밖으로 나왔다.
3 층 목조 건물은 고풍스럽다못해 어딘가 모르게 고독이 베여 있는 듯 외롭게 보인다.
조용히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 모차르트의 아다지오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1,2 층엔 더러 사람들이 앉아서 도란도란 얘길 나누고있고 조용한 음악 사이로
시가 낭송 되고있다.
언젠가 자신의 노트에 자신이 써 놓았던. 그래서 여러 번 읽은 듯한 시적인 풍경이다.
바람이 불어와 시냇물을 건드리고 간다. 물결은 즐거운 듯 춤을 추었다.
삼층 창가엔 파리한 얼굴의 여인 하나가 창 밖을 바라보며 앉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