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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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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페스트


BY 캐슬 2006-06-05

 

                      템페스트

                                      

남편의 외도는 벌써 며칠 째이다. 외도라고 했지만 겨우 안방에서 작은방으로 잠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처음엔 거실에서 자더니 아들놈이 귀대를 하자 아들 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더니 벌써 일주일을 넘기고 있다. 식구라고 둘 뿐인 집 안엔 낮고 음습한 공기만 가득하다.

처음엔 혼자 쓰는 넓은 침대가 좋았지만 마냥 좋기만 한 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작은방 문틈으로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화장실의 불을 켜니 하얀 불빛이 잠옷 바지에 묻는다. 얼른 불을 꺼 버렸다.

밤중에 거울속의 얼굴를 보게 되는 일은 늘 낯설다. 거울속의 얼굴이 거울밖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너는 어떤 사람인가하고 묻고 있는 듯 하다. 그대로 불을 켜 두면 거울 속으로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습관처럼 나는 거울 속을 들여다 볼 것이다. 그러다보면 기다림에 열이 올라 있는 내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같은 길을 가는 문우인 사람과 문학 기행 길에 복숭아꽃이 이우는 과수원에서 해실거리며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따끈한 메일 함을 여는 순간 운동 갔다 오마 하던 남편이 하필 그 순간 작은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게 뭐냐?”

“......”

열린 메일화면에선 환하게 웃는 남자와 내가 가득하고 순간 당황한 나는 메일 삭제 버튼을 눌렀고 남편은 다시 열어보라고 떼를 썼다. 휴지통까지 비운 다음이라 다시 열수 없다는 설명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남편을 설득하다 지친 나와의 미묘한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남편의 화는 처음엔 이슬비로 시작했으나, 소나기로 변했고, 장마 비처럼 우중충 해지더니 급기야 태풍의 조짐이 보이고 이젠 태풍의 핵 속에 들어있는 듯 하다.

오늘 밤도 잠님이 올까하고 집안의 모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나는 삼십초에 한 번 씩은 몸을 뒤척이며 잠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낯부터 계속해서 듣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d단조 템페스트(폭풍)를 틀기 위해 어둠 속에서 더듬거려 리모콘을 누른다. 들을수록 알프레드 브란델의 연주가 좋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d 단조에 폭풍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연은 이렇다.

베토벤에게는 신들러라는 제자가 있었다. 신들러가 어느 날 이 소나타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청하니 베토벤은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으라고 했다. 그 대답이 이 곡의 제목이 되었다고 한다.

이곡은 3악장으로 되어있는데 긴박하고 어둡고 극적인 그림자가 넘쳐흐른다. 1악장은 환상과 형식감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악장으로 변화가 풍부하며, 2악장은 1악장과 3악장 사이에서 차분한 동경을 음미하면서도 그 분위기는 상당한 긴장미가 넘쳐흐른다. 화가 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면 오른손과 왼손을 한 순간의 쉼도 없이 건반 위를 뛰게 하여 건반위의 폭풍을 쐬게 한다. 마침내 마음에 차 오르던 화의 바람도 폭풍 속에 가라앉고는 한다.

적어도 폭풍을 들을 때면 현대음악요법의 기초이론인 카타르시스 이론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 넣어야한다. 그래야 슬픔이 넘쳐흘러 슬픔이 덜어진다. 가득 찬 물 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다.

나는 갑자기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싶어졌다. 욕실로 가기위해 일어섰다. 안방 문을 밀었을 때 작은방에서 나오는 남편과 마주섰다. 남편이 볼 일을 보는 동안 나는 남편의 베게를 안방으로 가져다 두었으며 욕실에서 나오는 남편의 팔을 붙잡아 안방으로 이끈다.

“미안해. 사이좋게 살자”

못이기는 척 안방으로 들어서던 남편이 한마디 보탠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건 너무 하다”

사진 한 장으로 인한 우리 집의 템페스트는 이렇게 잠 재워질 듯하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무슨 일이든 기다릴 수만 있다면, 삶이란 기다림만 배우면 반은 안 것이나 다름없다는데,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을 기다린다.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린다. 떠날 땐 돌아오기를, 오늘은 내일을, 아이는 엄마를, 넘어져서는 일어나기를, 나는 너의 이해를.


간지럽다. 창 밖으로 밤하늘이 간지럽다고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