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정 은영
어느 날부터 인가 남편이 어디서건 흙을 가져다 정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디에 정원 만들 흙이 있겠느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외출에서 돌아오던 난 대문 앞에 산처럼 수북하게 흙을 내려주고 있는 트럭을 보았다. 흙이 다 내려지고 셈이 끝나자 트럭과 인부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돌아서 가 버렸다. 이제 삼층까지 흙을 퍼 올리는 일만 온전히 우리 네 식구 몫이 되었다. 힘을 쓸만한 사람은 남편과 아들뿐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겨우 고등학교 이학년이었으며 중학교 일학년인 딸 그리고 비실비실한 내가 일꾼의 전부였다.
남편은 도르래에 양동이를 달아 삼층으로 흙을 퍼 올리며 이렇게 하면 금방 다 올린다며 큰소리를 치며 일을 시작했다. 흙을 퍼 올릴 처음 얼마동안은 남편도 힘이 펄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 손은 더디어져만 가고 나와 아들에게 열심히 안한다고 타박을 주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게 그냥 화분이나 몇 개 사오면 될 것을 일을 이리 크게 만들었다고 트집을 부리고 아들은 공부해야한다며 투덜거린다. 이미 집 앞 골목과 계단은 황토 흙으로 붉게 물들었고 가족간의 불협화음의 소리가 나기 시작했으며 하루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다.
그때 내가 흙을 퍼 올리지 않아도 될 비책을 생각해 내었다. 이웃 공사장에서 흙을 고무대야에 이고 퍼다 올리는 아줌마가 생각났다. 남편에게 내가 가서 그 아줌마하고 올 테니 삯을 알아서 정하라고 하고는 그리로 냅다 달려갔다. 지쳐가던 남편은 별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하라는 표정이다. 아줌마 두 분이 흔쾌히 우리 집으로 와 주었다. 한번 이고 올리는데 얼마로 할 것이냐 아니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간에 다 올려 주는데 얼마로 할 것이냐 로 약간의 흥정이 오가더니 일금 십 만원에 계약이 이루어졌다. ‘ 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분의 흙 나르기는 달인이 경지다. 흙을 삽으로 이쪽저쪽 착착 다져서 고무대야에 서너 삽을 얹은 다음 머리에 착 붙여 이고 손도 대지 않고 살랑살랑 걸어 올라간다. 우리식구 넋 놓고 바라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전 가족간의 짜증도 이제는 흙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여유 있는 화해 분위기가 저절로 조성되어 여유 있게 뒷전으로 물러나 아주머니들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밥을 한다는 핑계로 삼층으로 올라온 나는 흙을 다 올려준 아주머니가 가고 남편이 계단을 물로 청소를 하는 걸 알면서도 붉은 흙이 싫어서 내다보지도 않았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남편은 노동일 아무나 하는 거 아니란다. 아버지가 열심히 돈 벌어서 너희들 뒤를 닦는 까닭은 너희들이 손톱 밑에 흙 안 넣고 편하게 돈벌어 먹고 살라고 공부시키는 것이니 공부 열심히 하란다. 아들은 알아들었는지 눈만 껌벅인다. 그럼 다들 힘든 일 안하면 누가 이런 일 을 해 낸단 말인가? 우리 가족 우리 아들은 안 되고 남의 집 사람은 된단 말인가? 남편도 나도 참 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흙이 올려진 이후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흙을 어떻게 가둘 것인지의 문제로 여러 번 삐걱대다가 바위를 또 사 들여오는 수고를 거쳐야 했고 시멘트로 구멍을 메우는 미장의 일도 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엔 무슨 나무와 꽃을 심을 것인지, 채소는 얼마만큼 심을 것인지가 또 문제였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남편은 모과 매실 국화 같은 유실수와 묘목을 관리하고 나는 잎채소를 가꾸기로 했다.
깻묵이 거름에 좋다는 소리를 어디서 듣고 오더니 아침저녁으로 깻묵 삭힌 물을 열심히 주어 꽃나무와 화초를 몽땅 죽여 버려 부부싸움을 할 뻔도 했었고, 내가 제일 아끼는 백합꽃이 너무 많아 싫다고 죄다 뽑아버린 남편이 미워 남편이 아끼는 줄장미를 보라는 듯이 잘라 버리기도 했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마당은 제법 정원과 남새밭의 중간형태로 만들어졌다. 상추 부추를 심는 봄부터 풋고추에서 붉은 고추를 따 먹는 가을까지 농사꾼의 흉내를 그럴듯하게 하며 보낸다. 여름이면 등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어 작은 그늘에서 오후시간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뜨거운 여름햇살아래 파란 고추가 대롱대롱 열리기 시작하면 고추나무 잎사귀 아래를 자주 살핀다. 맘에 드는 고추 몇 개를 따와서는 맛있게 된장에 찍어 먹는다. 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추는 게으른 나에게 꼭 맞는 채소이다. 물을 주지 않아도 씩씩하게 잘도 자라준다. 아랫부분을 모질게 잘라내어도 이내 파랗게 올라온다. 단지 흠이라면 자꾸 잘라내다 보면 굵기가 가늘어 지는 게 흠이다. 겨우내 흙 속에서 잘 견딘 부추가 나붓하게 올라온다. 초벌부추는 보약 한재라는데 해마다 나는 돈 안 드는 보약한재를 먹으며 봄날을 보내고 있다.
정원인지 남새밭인지 모를 마당에서는 오늘도 봄날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