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내사랑 가브리엘’을 쓰는 이유
글 아미라
우선 솔직히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크리스찬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목사가 주인공인 글을 쓰자고 덤볐을까. 어쩌자고 시작했던가.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두렵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사는
편이 침묵하는 편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 침묵이 무언의 동의
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대개의 한국인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때가 되면 점을 치러다녔고 일간지
에 실린 오늘의 운세를 즐겨보았고 주말이면 산놀이 삼아 절에 다녔고 성
탄절 부활절에는 신자인 친구들이 가져다주는 사탕이며 달걀을 즐겨받았
으며 꼬박꼬박 성탄카드 만들어 보내는 재미를 틀어쥐고 살았었다.
나는 공부 많이한 신학인도 아니며 제대로 된 불자도 기독교인도 그렇다
고 확실한 샤머니스트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전능의 신의 존재를 믿
으며 살아왔고 나라는 존재의 미천함을 알고 있으며 그럼으로하여 겸손함
을 거두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외국으로 나와 살다보니 그 미천한 내가 더더욱 미천하고 작디작은 모
래알 한톨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도 내가 이 소설을 그리
고 이러한 부연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유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종교들이 존재한다. 믿는 자들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 제각각의 믿음만큼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목
과 증오가 그네들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증오-. 이 얼마나 무서운 단어
인가. 결코 함부로 쓰여질 수 없는 단어가 아닌가. 삶의 자세이며 방편
이 되어야 마땅한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죽이고 싶을만큼
증오해야 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만의 것
도 아니다. 우리는 공존해야 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하며 위로해야 한다.
반목이란 정치인들이나 해야 할 일이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세상을 일구어나갈까 궁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나는 믿
고 있다.
나는 중동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디에 살고 있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기본적인 논리를 이제야 깨닫고
있다. 나는 그저 막연히 모든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을 예전부터 품어오고
있다. 스님을 만나면 목례에 합장을 했고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만나면 정
중하게 목례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들 모두를 존경한다. 힌두교 사원
앞에 가서는 코끼리 상에 절한 적도 있고 이슬람의 성자들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으며 랍비들의 책을 애독한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세상이 무섭다.
나와 ‘믿음’의 사이클이 맞지 않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고 있음을 목격하면서부터 나는 이 세상이 너무나 무섭다.
앞으로 내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내 마음
에 맞게 정리정돈해주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 미천함을 알기에 더더욱
이 세상이 무섭다. 누구도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탱크
를 밀고 들어가 한겨울에 이십 여채의 팔레스타인 가옥들을 쓸어버리고
도 의기양양하게 외신카메라맨을 향해 웃음지어보이는 유대인청년군인
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이 세상에서 제일 석유가 많이 나는 나
라라는 단 하나의 이유였음을 모든 사람이 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장기독재청산과 민주주의양식을 들이대며 이라크를 침공한 우리들
의 친구 미국을 바라볼 때도 내 가슴은 떨린다. 믿음이 다르니 성전’
해야 한다며 평화로운 아침에 무고한 사람들이 든 빌딩을 항공기로 공격
하는 이슬람 저항 세력들을 볼 때 나는 가슴이 매우 떨린다. 그리고 이렇
게 단편적인 그러나 지속적이며 끔찍한 뉴스들과는 정반대의 얼굴들 또한
이 세상에 있음을 깨달으며 한 손으로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어려운 현지인들을 보살
피는 종교인들이나 국제단체들을 볼 때, 그리고 빈민을 위하여 일년 중
날을 정하여 온 아랍권이 양고기와 물품을 나누는 것을 볼 때 나는 이 세
상의 아름다운 얼굴을 확인한다. 그것은 정말로 커다란 힘이며 이 모든
아름다운 일들은 각각의 ‘믿음’이 해내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 세상 안의 가장 미천한 존재인 나, 나는 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은 욕심으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이 언제 어떻게 끝이 날지 나 자신조차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 언젠가 내가 어렸을 적에 교회 곁에 살았었다는 자그마한 이유를
덧붙여서 주인공을 목사로 정했음에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려한다. 그리
고 나처럼 생각하는 나만의 독자들을 많이 갖고 싶다. 그들의 따끔한
충고도 곁들여서. <2003년 11월 19일 내 아들 라시드의 생일날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