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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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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BY 이윤하 2005-11-14

1

낮은 창가 넘어로 마지막 동백꽃이 만개하자 진아는 책상에 엎드려 꽃들에게 눈을 거두지 못한다..
짙게 윤기나는 무성한 녹색 잎들 사이에 거만하게 타오르 듯 사뿐히 앉아있는 붉은 동백꽃...동백의 작은 키와 붉은 입술을 천하게 여기기라도 하는 냥, 기다란 키에 우아한 자태로 하늘을 향해 살짝 입술을 벌린 찬란한 표정의 백목련...
진아는 슬픈 눈으로 꽃을 바라본다.
봄 햇살...그리고 푸른 물이 주루룩 흘러내릴 듯 한 하늘...
언젠간 가버릴 봄을 따라 뚝뚝 자결할 꽃들...
진아가 나즈막이 중얼거린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진아는 엄마가 좋아했던 시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릴 적,  마당에서 스스로 목을 꺽으며 툭하고  떨어지던 동백꽃을 목격한 진아는 너무 무서워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진아가 손을 댄 것도 아닌데...마치 진아 앞에서 처연하게 자결하 듯...갑자기 댕강...하며 떨어졌다. 놀란 손과 입이 서로 붙어 버렸다.
며칠 후 그렇게 고고하던 백목련나무도 늙고 추해버린 꽃잎을 툭툭 바닥에 던져버렸다.

부질없는 생명...저렇게 지고 나면 그만인것을...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마루에 기대앉은 엄마가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읊조리던 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진아에게 꽃들의 자살은 단순한 자연의 섭리가 아니었다.
늘 불안해 보이던 엄마와 오버랩 되던 그 모습...모가지를 툭 꺽으며 바닥에 떨어지는 꽃들은 불안하게도 엄마와 닮아 있었다.


봄이 가는 것이 두렵다.
매 년 같은 계절에 보게 되는 꽃 들과 엄마...
엄마가 이 계절에 사라져 버리지만 않았어도 아마 꽃들의 자결은 철든 진아에게는 자연의 섭리쯤으로 치부될 수 있었겠지...
엄마....엄마...엄마....
엄마는 추한 모습으로 매달려 결국은 나무에게 버림받고 떨어지던 백목련을 싫어했다.
엄마가 좋아하던 동백꽃...예고없이 매몰차게 떨어지던 동백꽃은 엄마와 닮았다...
잠 든 진우와 진아의 볼에 짧은 입맞춤과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린 채, 엄마는 예고도 없이 매몰차게 생을 정리했다.
진아가 열 세살, 진우가 열 살이 되던 봄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걸 알았을까...
진우는 까무러치듯 삼 일 밤 낮을 울어댔고, 진아는 멍하니 엄마의 영정사진만 바라볼 뿐이었다.
흐르지 않던 눈물...문상객들은 울지 않는 진아보다 까무러치듯 우는 진우를 보며 어린 것이 어떻게 죽음을 알고 저렇게 슬퍼하냐며 의아해 했다.
하지만 어려서 부터, 엄마 옆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던 외로움을 느꼈던 진우야 말로 엄마의 죽음을 더 실감했는지도 몰랐다. 늘 떠나버릴 것만 같던 공허한 엄마의 눈에서 감지되던 헤어짐의 징조...항상 엄마의 옷자락을 놓지 않아 진우의 왼손은 언제나 땀투성이었다.
엄마...어느 봄 날, 동백꽃 처럼 처연하게 지던 엄마...덤프트럭에 몸을 날려 치솟은 후 떨어지던 엄마의 몸은 분명 동백꽃 같았겠지...

진아는 한 참을 엎드려 눈물을 참아 본다.

"툭"

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걸까?
진아는 놀라 고개를 든다.
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공부를 하고 있다.
진아 앞에 날아 든 종이비행기...둘러봐도 고개를 든 사람은 도서관에서 진아 한 명 뿐이었다.
누굴까...
진아는 비행기를 만지작 거리다 종이에 배겨진 글씨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비행기를 펴보았다.

[다시 날아 든 제비아가씨...
 작년 겨울 따듯한 남쪽나라로 날아갔던 제비가 이제야 돌아왔군.
 네가 없던 이 곳 겨울은 정말 춥더군.
 고맙다, 다시 와줘서...... 행복한 왕자]

진아는 잘못 날아든 비행기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해 종이를 들고 한참을 두리번 거렸지만 그녀의 비행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굴까...잘못 날아 든 것이겠지?
진아는 한 참 두리번 거리던 고개를 다시 숙인 채 책을 본다.

"툭"
책 위에 정확히 날아 든 두 번째 종이비행기...
진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역시 진아와 마주치는 눈은 없었다.

[제비아가씨, 당신한테 정확히 날아든 거 맞으니까 두리번 거리지 말 것]

알 수 없는 일이다. 3년동안 학교를 다녔어도 누구 하나 진아를 아는 척 하던 낯선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의 장난일까?
진아 주위에는 학과 동기 몇 명과 정은, 윤희 뿐...아는 학생은 없었다.
진아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해졌다.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은 후, 살며시 일어났다.

"..어디가?.."

정은이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옆에 있던 윤희도 멀뚱하게 바라본다.

"아르바이트. 열심히들 해."

진아가 낮게 대답하고는 생끗 웃으며 뒤돌아섰다.


2

도서관 입구까지 정은과 윤희가 따라나온다.

"너 서진이 과외 다섯 시부터 잖아. 왜 벌써 가?"

"그냥...별로 공부할 마음이 안생기네."

"봄바람 살랑?"

"아니...오늘 엄마 기일이잖아..."

"아 맞다. 그랬지? 몇 시에 지낼거니?"

정은이 묻는다.

"과외끝나고 9시쯤에..."

"다 준비했어? 우리가 먼저 가서 대충 해 놓을까?"

중학교 때부터 엄마의 기일에 함께 있어 준 친구들...

"그래주면 좋구, 준비는 다 해놨는데 진우가 혼자 있으니까 니들이 진우 학교 마치는
시간에 가서 진우랑 좀 같이 있어줘."

"엄마한테는 언제 갈건데?"

"지금..."

"진우는?"

"진우 조퇴한다는 거 그냥 토요일에 같이 가자고 말했어."

"야, 정은아. 너 들어가서 가방 챙겨와. 같이 가자. 거기까지 버스타고 언제 갔다 올려고 그래."

"그래야 겠다."

정은이 도서관으로 들어가자 진아가 소리친다.

"정은아, 됐어. 나 그냥 혼자 가도 되니까 너희는 들어가서 공부해."

"됐어, 유진아. 우리도 엄마한테 가본지 오래 됐잖아. 같이 가지 뭐. 오랜만에 드라이브도 하고..."

"고맙다, 윤희야."

"작은 엄마한테 말씀드리고 서진이 과외 미루자. 엄마 기일에 까지 과외하게 생겼냐?"

"아냐, 그러지 마. 나 과외 미루는 거 싫어. 이제 고 3인데 더 해주지는 못하고 미루면 되니? 작은 어머니께서는 수업료 날짜 어기신 적도 없이 얼마나 정확하게 챙겨주시는데..."

"어련하시겠어, 유진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나중에 서진이 대학가면 너 보너스 챙겨드리라고 말해야 겠다. 그 꼴통을 너니까 그나마 성적 올려놨지...하하하."

정은이 가방 두 개를 어깨에 매고 뛰어온다.

"야, 이윤희, 꼭 공부도 안하는게 가방만 무거워 가지고."

"그게 다 오너드라이버의 특권 아니겠냐?"

"아이고, 코딱지 만한 똥차 가지고 맨날 있는 척은..."

"김정은, 니 코가 우리 보다 큰 줄은 알았지만 코딱지까지 그럴 줄은...너 정말 엽기다."

"어휴, 이게...내가 이번 겨울에 꼭 수술한다. 가출을 해서라도 할꺼야."

"음...코는 수술한다 쳐도 아버지한테 잡혀서 뜯겨나가는 머리는 어쩔건데?"

"우리 아빠 때문에 못살아 정말, 이 코가 무슨 복코라고 손도 못대게 한다냐. 이렇게 태어나게 했으면 양심상 당신이 먼저 병원에 손잡고 가야 되는 거 아냐?"

"야, 우리 엄마도 니 코 복 들어오는 코라고 했어. 너 절대 수술하지 말래."

"이윤희...이제 코 얘기 그만하자. 코피 터질라 한다."

깔깔깔...

주차장에서 그녀들을 태운 낡은 경차가 미끄러지 듯 빠져나간다.

 

 

"엄마...나 왔어...정은이랑 윤희도 왔어...오늘 저녁 먹으러 올꺼지?"

"걱정되면 우리가 모셔갈까?"

윤희의 농담에 진아가 웃는다.
진아와 정은이는 절을 하고, 교회를 다니는 윤희는 기도를 드린다.

"엄마 묘는 어쩜 이렇게 때가 잘 입혀졌니..."

정은이 잡초를 뽑으며 중얼거린다.

"엄마가 생전에 좀 깔끔하셨어야지. 때들도 다 사람가려가며 나오는 거라구."

윤희가 비석에 떨어진 새똥을 휴지로 닦아내며 대답한다.

어릴 때 부터 동네 친구로 자란 정은과 윤희.
항상 진아의 옆에서 울고 웃던 친구들이었다.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두 친구는 진아보다 더 서럽게 울었고, 정은과 윤희의 엄마는 삼 일동안 문상객 치루는 일을 도와주셨다.
하지만 두 친구의 엄마도 처음부터 진아와 어울리는 것을 탐탁해 했던 것은 아니었다.
늘 우울증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진아 엄마가 동네 어른들에게 좋게만 보일리 없었고,  그 딸 역시 꺼림직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항상 밝은 미소와 예의바른 진아의 행동이 동네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무엇보다 학교 생활과 학원다니는 일에 모범적인 진아때문에 자신의 딸 들까지 닮아가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진아엄마의 제사까지 함께 돕겠다고 가는 딸 들을 말릴 핑계거리가 없었던 엄마들은 처음에는 윽박도 질러보고 좋게 타일러 보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팔자려니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자신들 마음도 편해진 것이다.
사실 진아는 엄마가 좀 이상했다는 것 빼고는 말 들을 것이 없는 아이였다.
엄마들은 중학교에 올라가 진아와 함께 공부하던 딸들이 성적이 오르자 점점 진아를 예뻐했고, 소풍 때나  체육대회 하는 날에는 도시락을 챙겨 주기도 했다.
셋은 이미 자매나 다름 없었다. 진우는 정은과 윤희의 친동생이었고, 정은과 윤희의 동생들도 다 진아의 친동생이었다.

"우리 엄마가 너희한테 너무 고맙다고 하시네."

진아의 말에 둘은 픽 웃는다.

"너네 엄마 원래 말 안하셨잖어."

평소에 말 한마디 없던 진아엄마를 생각하며 윤희가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다 변한다고 하잖아...너희들 없었으면 난 어떻게 됐을까...혹시...엄마 따라가지 않았을까?..."

"헉...이게...너 협박하냐? 계속 충성하라는 얘기로 들린다."

정은이 눈을 흘긴다.

"니 문장이해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하는구나. 하하하"

윤희가 박장대소를 하며 열심히 새똥을 닦는다.

"이놈의 새들은 왜 여기다 집중적으로 싸댄다냐. 니네 엄마 비위도 약하신데...겁없는 것들..."

깔깔깔...

엄마...보고 있어?...우리들 보고 있어?...언제까지 우리 이렇게 좋을 수 있겠지?  더 이상 나한테 슬퍼할 일 없겠지?...엄마가...책임져야 해...날 두고 갔으니까...
진아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또르륵 떨어진다.

"야, 유진아. 여기 새똥에다 흘려라. 잘 안 닦여지네."

진아가 슬퍼하려 할 때마다 윤희는 늘 농담으로 막아주곤 했다.

"하여튼 이윤희 알아줘야 해. 내가 너땜에 감정도 제대로 못잡고 산다."

"진아 너 과외 안빠질거면 지금 내려가야 돼, 벌써 네 시가 다 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