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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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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에 즈음하여


BY 土心 2004-09-24

마늘 몇 통 벗기고 나니 매운 즙에 손끝이 아리고, 콩 껍질 몇 개 벗기고 나니 손톱 끝이 뻐근하다.
며칠 전 성묘 다녀오는 길에 시댁 종가집 손 윗 동서가 싸 주신 농삿거리 몇 가지 손질하며 내가 떠는 엄살인데 이 엄살은 그냥 애교 섞인 깨살쯤으로 해 두면 좋겠다.

내 느끼기에 가을 들녘은 흡사 후덕한 아낙의 품이라 표현해도 좋았다. 남편 고향 마을 한 바퀴를 도는데 보아하니 논마다 익은 벼는 무거운 고개 가누지도 못하고, 논둑 밭둑 감고 덩굴손 뻗은 줄기 콩 꼬투리는 미처 일손 바쁜 주인 손길 목 늘여 기다리고, 어느 토담집 담 밑 작달마한 대추 나무엔 아기 엄지 발가락 만한 대추가 가지 꺾이도록 주렁주렁 매달리었고, 마당 너른 집 앞 뜰 키 큰 감나무엔 붉게 익은 단감이 빈틈없이 풍성하고, 비닐 지붕 씌운 멍석엔 붉은 고추 햇볕 받아 제 몸 말리기 여념 없고, 그 둘레로 묶어 세운 들깨단에선 숨을 참아도 깨 향이 코끝에 붙어 따라오고, 산소 가는 오르막 능선에는 밤나무 밤 송이가 한껏 독 오른 가시로 영근 밤톨 품기에 사력을 다하고, 산자락 둘러 가지 뻗은 소나무 솔향은 송편 빚어 쪄내기 맞춤한 향으로 농익어 있고, 여름 지나 멋대로 웃자란 무성한 잡초는 야산의 정취를 만끽하고도 남음 있게 해 주며, 습도 높은 날 발 아래 밟히는 흙의 향은 가슴이 녹아나도록 사랑스럽고.....그랬다.
하면 이렇게 안기우고 품어진 씨앗은 모두 다 果가 되어 이 가을 이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데 그 감사는 어디에 대고 하는 것이 맞을까
하늘님 감사 합니다.. 땅님 감사합니다.. 해님 달님 별님 바람님 비님....감사합니다..조상님 감사합니다..촌이 고향인 남편님 감사합니다...이러면 되나....진정 감사의 계절임엔 분명하다.

빗방울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하기에 서둘러 조상님들 묘를 두루두루 살펴 보고는 종가댁에 인사차 들렀더니 이미 70을 넘긴 육촌 시숙 내외가 고추밭에서 고추 따다 말고 죽은 부모 살아 만난 마냥 우릴 반긴다. 자손들은 도시로 다 떠나 보내고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촌엔 노부모들이 그렇게 사람 냄새 그리며 외로이 사시는데 보면 속 아파도 돌아서면 잊기 바쁘고 참 사람 사는 게 늘 그렇다.
잠시 돌아보니 명절이면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행렬에 끼어 열 몇 시간씩 차편에 시달리며 충청도 부여 시댁을 찾았던 세월이 내게도 십수 년은 되는데 그 뒤 몇 년 전부터 어머님을 서울로 모신 뒤론 남편 고향 찾을 일이 거의 없다. 서울 토박이인 나는 그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시골 생활도 적응이 안 되 맘 고생 몸 고생 적지않이 했건마는 그것이 향수가 되고 그리움이 될 줄은 그 땐 짐작도 못했던 일, 하지만 싫던 좋던 나 하던 짓은 시간가면 다 추억이 되는가.. 눈으로 보여지고 코로 맡아지고 몸으로 느껴지고 가슴으로 솟아나는 오감들이 이 촌을 이처럼 반갑고 낯익다고 하니 분명 鄕愁샘이 내게도 어느새 고였음인데 그러고 보면 흙내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손수 가꾼 텃 밭 채소의 그 맛과 귀함도 모르고... 세상살이 헛 살고도 다 안다 했을 뻔 했다.

내친 김에 덩달아 고추밭에 뛰어들어 빨간 고추 파란 고추 닥치는 대로 아귀 아귀 뜯어내고 '형님 저 이거 가져 갈께요' 염치없는 소리 볼메게 해도 '그래, 그래!' 허허허 좋기만 하다던 형님은 어느새 솔잎도 따 놓고, 콩도 따 놓고, 솔가루 말린 것도 한 봉지 담아 놓고....서둘러 갈 줄 알기에 얼마나 잰 걸음으로 맘을 담았는가 서울 돌아 와 주신 보따리 풀어 보니 가지가지 수북이더라... 내 깍쟁이 都心이 어디 그 후덕한 農心에 발끝이나 따라갈까 순간 그 정스러움에 감흡하고 만다.

이렇게 고작 일 년에 하루 찾은 시댁 고향에서 난 얼마나 많은 맘 보따리를 꾸려 왔는지 틈만 나면 풀러 보고 다시 묶었다 또 풀러 보고 이렇게 이 몇 날을 행복하게 보냈다.
허나 어찌 맘 뿐이랴. 싸주신 콩은 찜통에 살짝 쪄 송편 속으로 오물 오물 채우고, 뜯어 주신 솔 잎 깔아 솔 향 솔솔 기막힌 오색 송편 쪄 내고, 매콤 달콤한 청 홍 고추는 송송 썰어 녹두 빈대떡 맛 내고 모양 내며 노릇 노릇 지져 내고, 그 귀한 솔잎 가루는 따뜻한 꿀 물에 섞어 향 짙은 솔잎차 만들면 이 명절 내 집 찾는 손님도 이로서 대접함에 그 행복 전이 되지 않을까 감히 기대도 하며 명절 음식 준비 할 참이다. 

이제 이 글 맺으면서도 여전히 남는 맘은 오직 하나 "감사합니다"
해서 '공양게' 한 수 옮겨 그 맘 여기 남겨 둔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주림을 달래고 몸과 맘을 바로 하여
모든 생명을 위해 베푸는 도를 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