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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고이네르바이젠


BY 머큐리 2003-09-26

 뜨거운 여름날이다.
나는 수학 교과서와 맥가이버의 사진이 꽂혀있는 연습장을 앞에두고 몇시간째 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싱크대에 물 떨어지는 소리, 결혼한지 얼마 안된 큰오빠방에서 울려퍼지는 노랫소리.. 동물원의 거리에서..
거리에 가로등불이 소리없이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넘어 또하루가 저물면 웬지 모든것이 꿈결같아요..김광석의 애절한 음성이 점점 깊은 호흡을 더해가고 그 노래를 따라부르는 오빠의 노랫소리가 낮게 들려온다.
오늘 나는 그 분을 보았었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모두들 더위에 지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때 그분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서 계셨다. 담배를 입에 물고, 그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고단한듯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교정으로 돌아오고있는 소녀들의 장난끼가 발동하였고 금새 쓰러질듯 무거운 다리를 끌고 오던 그들중의 몇명이 약속이나 한듯 소리친다.
"선생니임~~담배좀 끊으세요~~" 무안할법도 할텐데 그는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한개피를 다 태워내고야 만다. 애써 외면하며 옆을 지나던 내 어깨를 툭 치며 그가 한마디 건넨다. " 이녀석아, 인사좀 해라"
잔뜩 적의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버렸다.

내가 왜 눈물을 보였을까.. 억울하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해 견딜수가 없어 가슴이 터질듯 화가 치밀었다.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일도 없던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저곳으로 떠나버린후... 노래가 절정에 다다르고,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귀기울이고 있던 나는 라디오를 틀고 한층 볼륨을 높여보았다.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이.. 흘러나왔다. 중간쯤 들었을까.. 나는 아예 방문을 걸어잠그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땀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안되는 마음에 담아두어 찌들데로 찌들어버린 걸, 맘껏 쏟아 놓았다.

 

다음날 그분은 떠나셨다. 사춘기의 짝사랑.. 가슴앓이가 그렇게 눈물로 끝나버리고 그때 나는, 내가 아픈 사랑을 다 알아버렸다고 결론지었었다.
꽤 많은 시간 동물원의 거리에서와,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을 들으며 다시는 그런 바보같은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사랑을.. 내가 정말 알았었을까..

시린 어깨를 움츠리고 차를 움직여, 볕좋은 이른 가을을 헤집고 나서던 아침..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라사테의 음악을 들으니 문득 사춘기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오랫만에 온전히 추억에 젖어보았던.. 9월의 끝자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