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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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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는 병


BY 다정 2003-09-13

못 말리는 병
                                                   

  "저 고질병을 누가 고쳐? 죽어야 고치지"
  몇 년 전 전임지에서 함께 근무했던 K교장 선생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대학원 다니면서도 이 연수, 저 연수 가리지 않고 쫒아 다니는 모습이 딱해 보여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못 말리는 병'은 자타가 공인하는 나의 중병이다. 병 인줄 알면서도 고칠 생각도 안하고 즐기면서 사니 죽어야 고치는 병임에는 틀림이 없다.
 '못 말리는 병'의 증세는 무척 다양하나 가장 큰 증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시작하다 도중하차를 잘하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다. 때로는 열정인지 무모함인지는 모를 정도로 거기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릴 때가 종종 있다.
  중학교 시절 피아노를 잘치는 친구가 부럽기만 하던 나는 직장을 가지자마자 동네에 있는 피아노 개인 교습소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출근 전에 치기 위하여 항상새벽에 일어나야만 했다. 어느 날이었다. 잠에서 깨니 창 밖이 환하였다. 시계를 보지 않은 나는 종종걸음으로 교습소로 향했다. 살림집과 함께 붙어있는 교습소는 불이 꺼져 있었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선생님께서 늦잠을 주무시나 싶어 기다려보자고 대문 앞에 털썩 주저앉아 버려버렸다. 그 시간이면 간간히 신문 돌리는 아이, 새벽 기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머니들이 종종 눈에 띄는 시간인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참 후 새벽이 되어 날이 밝은 것이  아니라  보름달이 온 세상을 환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숨이 턱에 닿도록 집으로 달려와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가 아닌가!  그 다음날, 새벽 시간에는 피아노 교습은 하지 않는다며 오지 말라던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미안했던지…… 새벽 두 시에 피아노 치겠다고 문을 두드렸으니 선생님 입장에서는 무척 황당하고 불쾌했으리라. 
  퇴근길에 배우러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는 한 시간이면 족한데 하루에 평균 서 너 시간씩  어느 때는 가라는 소리도 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을 때까지 혼자 흥에 겨워 밤늦게 쳤다. 처음에는 너무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하시던 원장선생님의 표정이 날이 갈수록 반가워하기보다는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매일같이 와서 잘 치지도 못하면서 몇 시간씩 쳐대니 지겹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는 그저 열심히 하는 것만이 최선일 줄 알았으니 '못 말리는 병' 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명곡 한 곡 제대로 칠 줄 모른다.
  방송 통신대학 경영학과 공부를 할 때다. 졸업 시험을 앞둔 여름방학 세 돌이 지난 아들을 아예 친정으로 보내고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새벽 두 시에 일어나 영어 단어를 외우고 일요일에는 남편을 영어 선생님으로 모시고 배웠다. 어느 날인가  30도가 넘는 한여름 날씨인데 온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솜이불을 꺼내 덮어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고 온 몸은 불덩이가 되었다. 급하게 달려온 친정엄마와 함께 병원을 가니 '급성 신우 신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일주일이나 치료를 받으며 고생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피곤하면 재발하여 감기, 위장병과 더불어 만성병으로 지금까지 나에게 붙어 다니는 병으로 못 말리는 병이 남겨준 휴유증이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중 3 아들을 두고 대학원을 다니고, 고 3 입시생을 두고 상담교사 공부하느라 밤늦게 집에 왔으니 주위에서 한심하다고 혀를 찰 만도 하다.  오죽하면 시집보내면 고쳐지려나 했더니 더 심해졌다면서 사위보기가 부끄럽다고 하시는 친정 부모님의 푸념과 한탄조차도 약이 되지 못한다.
  제발 좀 배우는 것 그만하고 기본에 충실하라고 화를 내는 남편 앞에서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하고서는 배우고 싶다는 생각만 들면 앞 뒤 가리고 않고 배우러 가고만다. 내가 생각해도  못 말리는 병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노래를 부르며 일찍 오라고 달래기도 하고, 내가 차려주는 밥상이 그립다는 말로 회유책을 써도 병이 고쳐지지 않으니 심각한 병은 병인데 약이 없다.
  오늘도 감기 몸살이 심해 조퇴해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병원으로 데려다 준 남편의 만류를 무릅쓰고 시민대학을 다녀왔다. 1시간 40분 걸려 도착한 중국어 교실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러 겨우 30분밖에 강의를 듣지 못했다. 30분을 위해 '죽겠다'는 소리를 하며 2시간 30분을 허비하는 이 어리석음이 못 말리는 병이 아니고 무엇이랴! 석 달이 지났는데도 따라 읽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니 '한심병'까지  보태야 될 것 같다.
  "의사 선생님 말대로 약 먹고 푹 쉬지 어디를 또 나가요?"
  하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나갔다 왔는데도 한약재를 사다가 다려 놓았으니 빨리 먹으라고 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말처럼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으면 될텐데…… 어처구니없게도 고맙다는 말 대신에 박사과정 공부하고 싶은데 보내 주겠느냐고 물으니 참았던 격한 감정을 쏟아낸다.
  가정불화를 일으키고 체력이 달려 시시때때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이 못 말리는 병이 이제는 그만 물러갔으면 한다. 체념하지도 못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고쳐보려고 애쓰며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과 아들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혼자 즐기니 진짜 못 말리는 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