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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


BY 다정 2003-09-13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

  '생노병사'라는 말이 있다. 태어나서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자연의 이치이자, 인생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누구나 다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 말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위력 앞에 넋을 잃고 할 말을 잃는 경우가 있다.
  지난 9월 중순 동 학년 선생님의 친정 장조카가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스물 일곱살의 청년으로 아침 출근길에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자식을 둔 부모여서 일까? 아니면 내 부모님의 아픈 상처를 떠올려서일까?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그 부모님의 심정이 되어 허탈에 빠졌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가슴이 쓰라릴까! 부모 앞서 저승길에 가는 것이 가     장 불효인데...... . 죽은 사람은 가고 나면 그뿐이지만 남은 사람은 평생을     가슴에 한을 묻고 산다던데...... . 아니야, 젊은 사람이 제 명대로 다 살아     보지도 못하고 간 것이 얼마나 억울할까!'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 앞에 스물 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임파선 암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죽은 여동생이 떠올랐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던 여동생은 깜찍한 용모와 상냥스러움으로 어릴 때 부터 동네에서 소문난 아이였다. 거기에다가 총명하여 국민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석을 놓쳐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 당시 부산의 명문여고인 경남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집안의 기쁨이 되기도 하였다.
  다방면에 재주를 가졌던 그녀는 사랑스러운 동생이기 이전에 언제나 나를 기죽이는 아이였다. 친구들이 유명한 동생을 두었다고 부러워할 때를 제외하고는...... . 전교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항상 영광의 자리에 서있던 아이, 집에서는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녀였다. 그림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으며 수를 놓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학교 선생님들 결혼식장에 가서 축가를 부르고, 혼수품으로 가져갈 수예를 놓느라 밤새우는 그녀에 대해 손재주가 없는 나는 항상 부럽기만 했다. 그런 여동생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무의식적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며 넘쳐나는 사랑으로 온 얼굴이 환해지곤 하셨다. 그때마다 '그


녀가 죽거나 멀리 사라져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던가! 여동생이 죽고 난 후 지금까지도 그 생각이 떠오르면 죄책감과 후회스러움에 사로잡힌다.
  '신은 공평하다'고나 할까! 미모와 재능을 갖춘 그녀였지만 어릴 적부터  몹시 몸이 허약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늑막염을 앓았고 기관지가 나빠 환절기만 되면 감기와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지냈다.
  그녀가 중 3이였을 때 군부대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가 배 사업을 하시기 위해 퇴직하셨다. 일년도 채 되지 않아 퇴직금을 다 날리고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누워 계시던 때다. 그녀는 담임선생님의 집에서 숙식하며 과외보조교사로 부유한 집의 친구들을 가르쳤다. 새벽이면 남보다 한시간 먼저 일어나 친구들을 깨워 공부를 가르치고 밤늦은 시간에 자기 공부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자존심은 얼마나 상했을까! 몸도 약한데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는 줄 모르고 오로지 담임선생님의 제자 사랑으로만 받아들이고 감사했으니....... 어린 제자에게까지 실리를 챙기셨던 그 선생님과  부모의 무지가 그녀의 죽음과 함께 아픔으로 남아있다. 그 휴유증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몸이 더 약해져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효심이 깊었던 동생은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그녀 특유의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하였다. 공부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할애해 집안 일을 돕고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 여동생까지 틈틈이 돌보며 집안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미 몸 속에는 사형선고와 같은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으니...... .
  고등학교 졸업후의 암 투병 1년 동안 그녀가 보여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놀라운 정신력은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맑은 하늘과 햇살이 비치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부모님과 언니, 동생들과 일년만 더 살아도 여한이 없겠다'로 시작된 투병일기는 한 줄의 원망도 없이 남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살아온 날에 대한 감사로 담담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온몸과 마음으로 참아내던 통증은 눈물이 아니고서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제 몫까지 대신해 부모님께 잘해 달라는 간곡한 글귀와 함께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삶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일러 주고 간 그녀였다.   
  때로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 뜻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소식을 들을 때 '인생과 죽음'이라는 화두를 놓고 오랜 시간 생각에 잠긴다. 그때마다 스물 한 살의 나이로 고운 넋이 된 그녀의 삶을 회상하며 진지함과 겸허함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