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
동네 서점에서 경제서적을 뒤적이고 있었다. 허겁지겁,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난뱅이
로 평생을 살게 되는 듯, 제목과 목차· 저자의 서문만을 훑어보며 빠른 눈길로 '라비린토스'를
헤맬때였다. 충혈된 눈뿐만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뛰고 있을 심장까지도 일시정지를 시킨 돌
발적인 상황은 바로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 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뭔가 단문(短文)
으로 내 삶을 스스로 요약할 수 없었던 답답함을 이 처세서의 제목에서 풀 수 있었고, 글자
한귀퉁이에라도 몸을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마음에서 바로 또다른 결심을 하는 바보같은 자
신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긴 잠이 주던 여유로움의 끝자락을 내내 놓치고 싶지 않은 아침처럼, 월요일이라는 주초(週
初)의 나도 휴일이 주던 나들이의 즐거움이 여직 남아있어 붓을 잡은 손길은 금시 흔들리기
마련이다. 먹도 집에서 갈아오지 않아 수업직전까지 급히 하느라고 여기저기 튀긴 지저분한
옅은 색의 검정방울은 차분치 못한 내 성격을 잘 말해준다.
서너장의 급히 갈겨 쓴 숙제를 검사맡은 뒤 당대(唐代) 최고의 서예가(書藝家)인 구양순(歐
陽詢)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을 임서(臨書)해 주시는 스승님을 차분히 바라보노라
면, 나른한 일상은 사치가 되고 어느새 다시또 의욕에 불타오르는 자신으로 변해버린다.
스승의 붓이 종이를 만날 때마다 벼이삭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어떤 예술에서나 마찬가지일 수 있겠으나 서예(書藝)만큼은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
한다. 한글자 한글자 붓이 끝을 맺는 순간까지 시선을 떼지 않는 세밀함과, 짧은 시간내에 명
예를 얻으려는 사욕(邪慾)을 버린 평온한 마음가짐과, 질퍽한 논바닥에 떨어진 나락 한알까
지 줍는 농부의 마음같은 정성을 가져야 함이 바로 서예의 기본인 것이다.
네 가지의 벗과 사귄지 1년 6개월! 스승님이 걸어오신 길의 이십분의 일쯤 온듯하다. 아래
로, 옆으로, 위로, 마구잡이로 뻗어갔던 가지들을 이제는 몰인정하게 쳐내야 할 때다. 서(書)
의 기본인 해서(楷書)도 마치지 못했으면서 전(篆), 예(隸), 행(行), 초(草) 등의 다음 장을 넘
기려는 성급한 마음도 초급자가 버려야할 것의 1순위이다. 먹이 진하고 끝에만 묻어 있으면
붓이 쉽사리 나가지 않고, 옅으면서 담뿍 적셔져 있으면 종이를 젖게해 찢어내기 십상이다.
측봉으로 쓰는 부분, 중봉으로 쓰는 부분, 가늘고 약하게, 때로는 굵고 강하게, 하나의 글자
속에서도 그 서법(書法)은 다양하기만 하다.
욕심그릇을 비우는 것이 향기 가득한 꽃을 피우는 길이다. 턱없이 높은 가지에 있는 열매를
따내려 하다가는 나무 아래로 떨어져서 다치게 된다. 이 모든 무욕(無慾)의 아름다움을 알려
주는 것이 서예의 매력이다. 가야할 길은 아직 멀고 성급한 마음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시작이
지만, 하는 듯 마는 듯 열정을 조절하면서 그렇게 가려한다.
나는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라는 책제목에서, 힘의 균형을 극도로 발휘하는 예술인 붓
글씨에서, 씨앗을 뿌리고 땀흘려 가꾼뒤 시간의 정점(定點)에서 거두어들이는 농부의 삶속에
서, 게으른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 의지의 불을 지피고 욕심을 소멸시킨뒤 새로운 나를 재생
시키는 방법을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