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
“여보세요”
“능인이가? 내데이”
"예, 그간 안녕하셨어요?“
“그래, 낸 잘 있다. 느근 별일 없제”
“예”
“능인아배는 하는 거 잘 되나”
“아, 예- 그냥그냥 그래요”
“그러믄 됐제 뭐 더 바라나, 요즘 세상에 입에 풀칠하면 잘 사는 기다”
“예-, 그런데 무슨 ......”
“근데 능인어매 내가 이런 말 한다고 섭섭해 마래이”
“......”
“느그 그라믄 안 됀데이. 느그 어매 그래 두면 안 됀다 그 말이데이”
“......”
“그 양반이사 아들 메느리 신세 안 진다고 말도 안하고 집에 가만 있지마는 느그들도 가만 있으면 안 됀는긴데. 느그들 나이가 다들 마흔이 넘었으면 알 거 다 알끼다마는 ......”
“......예-”
“하기사 내가 이런 말 하믄 시이모가 너무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한다고 뭐라 할 지도 모르지만서도......가끔 느그 어메 사는 거 들여다 보므는 답답해서 안 그라나”
“......"
"능인어매 내가 심했나“
“아니요”
“능인어매는 그만 하면 할만치 하그마는 경인어메는 맏이가 그러믄 안돼는 긴데......”
“......”
“됐다마 그만 하자, 말이사 입으로 쏟아지면 담을 수 없는 거이고 ...... 내 자석도 있는데 넘의 자석 탓하면 안 돼제”
“......”
“능인어메 그만 하제이”
“......”
“그나저나 느그 어메 다리가 더 아프다하더만......”
“아범이 오후에 모시러 갈거예요”
“그래”
“예, 내일 문인화 그리러 가시거든요”
“그래......”
“......”
“옛 말에 늘상 보는 놈만 혼난다카드만 그 말이 꼭 맞구마는”
“......”
“능인어메 내 미안타”
“별말씀을 다 하세요. 저희가 다 잘 못인데요 뭘”
“그래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마는......”
“......”
수첩을 들고 친척(1)이라고 쓴 페이지를 찾아 펴고 있었다.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써 있는 경인네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싶었다. 전화수화기를 들고 있는 내내 머리 속에서는 경인네 전화번호를 읽고 있었다. 숫자로 씌어진 전화번호는 그 번호를 가르키는 주인보다 더 단순하게 보였다. 너무 단순해서 읽고나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것이 문제가 되곤 했다.
#
“내 무섭데이”
“뭐가요”
“와 재인아배가 그러는 지 자꾸 무섭데이”
“......”
“가가 일이 그래 꼬이면 안 돼는긴데”
“......”
“그 땅도 그렇제, 오래 가지고 있거니 하고 사줬더만 덜컥 팔고......”
“그건 잘 한 거예요. 속아서 샀다면서요”
“내가 실수 했제, 그래 실수한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손해보지는 않았잖아요”
“그래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좋은데......”
“......"
"니한테도 전화 왔제“
“예”
“가가 와 그리 서두르는지 자꾸 무섭데이”
“......”
“어떤 상을 데리고 올지......”
“음식을 어떻게 할까요”
“특별히 하지 마래이, 우리 먹는데로 먹제, 달리 준비할 거 없데이”
“그래도......, 만두 할까하는데요”
“니가 힘들지 않겠나, 그러면 좋제”
“저녁에 만두 속 만들어 놓고 내일 아침나절에 빚으면 돼요. 어머니가 좀 도와주세요”
“하고말고”
“......”
“가가 아파트 계약했다 하드마는 느그 들었나”
“아니요, 근데 벌써요......”
“그랬다카드라, 가 지금 있는 데가 가게 뒤에 달린 창고방 아이가 춥긴 많이 춥드마는 그래서 빨리 얻었는갑다”
“......”
“...... 내 전화 한 번 더 해 볼끼다”
“......”
“해도 될까, 또 봉변 안 당할라나, 가슴이 자꾸 떨리는거이, 자꾸 무섭다”
“마음 편히 가지세요”
“애들이 불쌍해서 안하나”
“저도 알아요”
“재인어매가 마음만 바꾸면 지금이라도 내는 받아줄 수 있데이”
“......”
“재인아배가 재인어매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한데이”
“......”
“가들이 얼라들을 어쩔려고 저라는지 모르겠데이”
“......”
“그라믄 안 돼는데”
“......”
“올 해 내가 불공을 조금 드렸더만......”
“......”
“내가 와 이리 불안하노”
“불안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래요. 다 인연따라예요”
남편은 나를 불렀다. 내 키보다 더 높은 냉장고 위를 보라고 했다. 나는 발판을 놓고 올라가서 보았다. 뽀오얀 먼지가 냉장고 위에 가득했다. 보이지 않는 곳의 먼지. 나는 늘 보이는 곳의 먼지만 쓸고 닦았다. 얼만큼 안 닦았을까. 이사 온지 일년. 그러니까 일년동안 쌓인 먼지다. 걸레를 들고 와서 소리 없이 먼지를 닦았다. 일년을 살아남은 먼지. 앞으로도 냉장고 위를 의식하지 않으면 또 그렇게 일년이든 이년이든 먼지가 쌓일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쌓여 있는 먼지가 내게 위안을 줄지도 모른다. 흔적. 흔적 말이다.
#
남편은 없었다. 십이 년 전 봄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없었고, 그 해 가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없었다. 그리고도 중요한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때면 나와 같이 참석하지 못하는 때가 더 많았다. 친정의 작은아버지는 그것이 조카사위의 복이라고 했다. 궂은 일 안 보는 것도 그가 가지고 태어난 복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친정 언니는 안 그랬다. 복이 아니라고. 그것은 복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식구들이 참석해야하는 행사에 늘상 빠지게 되는 것은 복이 절대로 아닐 것이라고. 어떤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직까지도 집안의 특별한 날에 남편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의도한 바는 절대로 아니다. 다 우연이었다. 출장을 가 있거나 가는 날이거나 출장을 가서 돌아오는 날이거나 그랬다. 그렇지 않으면 외국에서 중요한 바이어가 와 있어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다거나 말이다.
키가 나보다 이십 센치미터는 더 큰 여자가 들어왔다. 선물 보따리를 현관에 놓고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어색한 절을 올렸다. 절은 정말로 어색했다. 일 년에 한 번 설에나 했을 것 같은 절이었다. 손의 모양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엉거주춤 폈다. 그래도 그런데로 보아 줄만은 했다. 인사가 늦었다고 먼저 말을 하길래 나와 어머니는 동시에 눈이 마주치며 놀랐다. 늦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그저 인사치례 같지만은 않았다. 주스를 세 잔 가져다 놓고 나는 부엌으로 가서 만두국을 끓이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애매했다. 5시 10분 경에 저녁을 준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 망설여 졌다. 만두는 이미 다 빚어서 냉동실에 들어 있었고 다시국물도 이미 다 끓여서 솥에 담아져 있었다. 가스랜지의 불을 켜고 만두만 넣으면 국은 십 분안에 다 끓여 질 것인데...... 어머니와 그 여자의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냉장고 옆에서 만두국을 담은 그릇에 고명 얹는 것을 도와 주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냉장고 위의 먼지가 거슬렸다. 분명 볼려고만 하면 볼 수 있는 먼지들이었다. 왜 나는 불안할 까. 반찬의 가지 수보다 냉장고 위의 먼지가 더 거슬렸다. 만두국을 먹는 내내 나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2003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