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주말계획이 없는 날은 어김없이 산을 오르곤 한다. 그것이 어느사이 우리가족의 여행 방식이 되어 버렸다. 여행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만만한 것이 산행이지만 사실 산행은 만만치가 않다. 그런 만큼 산에 다녀온 느낌도 하찮게 팽겨쳐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닌 산행이 준 여운은 일주일 동안 감미롭게 지속된다.
일종의 '산 중독' 현상이라고 해야할 그것에 최근 우리가족이 푹 빠져 있다. 특히 남편 은 두어달 가까이 새벽마다 산을 오르는 동안 그 증세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새벽잠이 많은 나는 같이 가자는 남편의 제안을 한번도 따른 적이 없지만 마음 한편으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산행을 나서는 남편이 참으로 대단해 보인다.
남편이 아침마다 오르는 산은 동네 뒷산이 아닌 해발 810미터가 넘는 천마산이고 보면 내 눈길은 한층 우러러 보는 마음으로 바뀌고 만다. 그렇게 산에 대한 끝없는 애정전선을 만들어 가고 있는 남편은 주말이면 으례껏 '산에 가자'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다행히 나도 산을 좋아하는 편이고 간절히 산행을 원하는 것 같진 않지만 아이들도 대체로 잘 따라와 주니 이래 저래 가족산행이 주말행사처럼 이루어 지곤 한다.
덕분에 주변의 유명한 산들을 어느정도 한번쯤 다녀볼 정도가 되었고 이젠 차원을 높여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까지 시도를 할 만큼 실력이 늘어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내겐 산을 오른다는것은 다만 정상을 향한 걸음을 묵묵히 옮기는 단순한 '등산'보다는 산이 갖고 있는 다양한 모습과 나무와 풀과 꽃과 그 꽃에 앉은 나비와 곤충들을 보면서 산을 다니는 '산행'에 가깝다.
철철마다 숲 속을 수놓곤 하는 꽃들의 향연을 즐기는 일은 산행의 매력중 그중 으뜸이다. 겨울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동안 주변에서 흔히 볼수 없었던 들꽃들이 산중에서 피었다 졌다를 반복하는 모습은 늘상 보아도 감동을 준다.
지난 봄, 철쭉축제를 겸해 올랐던 서리산을 가는 길에 가장 많이 피어있던 꽃은 달맞이꽃이었다. 밭두렁, 버려진 묵정밭, 돌틈을 비집고 달맞이꽃이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샛노란 꽃봉오리를 펼치고 있었다. 아침안개를 밤으로 착각했던가, 달이 뜬 밤에 활짝 피어야 할 달맞이꽃들이 제 세상인양 꽃봉오리를 만개하고 있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리산 860미터를 오르는 첫 관문이 제법 가팔랐다. 말하자면 이 산은 처음부터 진을 빼놓게 하는 산인 셈인데 그 길목을 올라 진짜 산길로 진입하는 작은 소롯길은 항상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 아름다운 길이다. 봄에 왔을때 금낭화가 참 예뻤던 그 길에 연보라색 벌개미취가 길 양쪽에 가득 피어나 있었다. 덕분에 초록산이 보라색 꽃점을 띄우고 바람이 불때마다 물결처럼 흔들리는듯 했다. 꽃길 사이를 걸어가니 보라색꽃 물결속 황홀함으로 잠깐 산행의 목적을 잊고 그곳에 그만 주저 앉아 한없이 꽃바라기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보라빛 꽃터널을 지나니 본격적인 노송과 잣나무가 우거진 숲이 반긴다. 침엽수림 특유의 서늘하고 향긋한 기운이 숲가득 퍼져 꽃길 못지 않은 환상적인 길이다. 봄 무렵에 숲길 가득 작고 하얀 꽃을 달고 있었을 애기나리 군락이 넓게 퍼져 있어 숲은 한결 신비롭게 느껴진다.
눈으로는 결코 확인할수 없는 피톤치드의 강력한 살포작용이 확연히 느껴지는 것 같은 숲. 침엽수림으로 빽빽한 그길을 오르면 작은 등성이가 쉬어가라 살짝 마침표를 찍는다. 쉼호흡을 길게 한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칡넝쿨이 길을 가리기도 하고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아 서기도 하고 암벽들이 떡 하니 서서 돌아서 가라고 호령을 하는 듯한 길이 끝도 없이 나타난다. 호흡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헉헉대며 산길 한쪽에 마련된 밧줄에 한껏 몸을 의지하며 겨우 겨우 걸음을 옮겨 놓는다. 하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힘겨운 비탈길도 어느샌가 끝이 나고 다시 완만한 산길이 뻗어있다.
시원스럽게 잎을 펼친 참나무 군락이 철쭉동산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800선 고지를 넘으니 '철쭉동산'이라는 팻말이 떡하니 서서 우리 손을 이끌어 준다. 지난 봄 철쭉동산 가득 연분홍 꽃들로 장관을 이루었던 철쭉은 이미 꽃도 지고 푸르던 잎새들도 조금씩 갈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손에 잡힐듯 가까이 서리산 정상이 보인다.
오는 동안 힘들었으되 산 정상을 보면 힘이 다시 솟는다. 그것은 어느정도 산을 오르다 보니 생긴 습관이다. 가볍게 정상까지 오르고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축령산을 향해 다시 능선을 탄다. 서리산 정상에서 축령산 정상까지 3킬로 가량의 만만치 않은 길이다. 길이를 가늠하며 위축되어 있는 나와 달리 완만하게 이어진 능선을 함성을 지르며 내달리듯 앞서가는 아이들은 오히려 생기가 넘쳐 보인다.
'그래, 한 번 가보자' 높이로 보자면 축령산이 서리산 정상보다 300미터 정도 더 높은 정도이니 길은 그리 험하지 않을 것이었다. 생각보다 길은 완만하게 이어져 있었고 길 양쪽에 억새가 우거져 있어 색다른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가을에 오면 이곳도 장관이겠다' 남편의 말엔 가을에 다시 오자는 함의가 은근히 묻어나온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뭐, 이런 낭만적인 길을 걷는 산행이라면 나도 한번 더 와주지'.... 그렇게 갈림목에 올 때까지 억새밭을 헤치며 부드럽게 이어진 산길을 걸었다. 갈림목에서 다시 산을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다. 그곳에서 보니 서리산 정상에서 잡힐듯 가깝게 느겨지던 축령산 정상이 아득해 보인다.
다시 한번 쉼호흡, 축령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싸리나무 울타리다. 보랏빛꽃을 주렁주렁 매단 싸리나무들이 아름들이 자라 길 양쪽을 포근하게 감쌌다. 기꺼이 싸리나무 꽃구름 속으로 몸을 맡긴다.싸리나무꽃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길은 다시 가팔라지고 한쪽에 놓인 밧줄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기가 쉽지 않은 벼랑길이 이어졌다.
힘겹게 나무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동안에도 아빠한테 배운대로 아이들은 마주치는 어른들께 '안녕하세요'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인사를 해오는 꼬맹들 한테 어른들은 수고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고 덩달아 신이 난 아이들의 발걸음은 생기를 되찾는다.
아무리 힘든 길도 끝이 있은 법임을 산을 언제나 새삼스럽게 알려 준다. 마침내 정상, 시원한 바람을 폐부 깊숙히 들이 마시는 그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해 낼수 있을까..
내려가는 길이 쉽지가 않았을 정도로 축령산은 가파르고 험한 산이었다. 남이장군이 호연지기를 키웠다는 남이바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아래는 까마득한 벼랑길이다. 보는것 만으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길은 독수리를 닮아 수리바위가 되었다는 그 길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곳에서 이상한 (?) 차림의 부부를 만났다. 그들 부부는 물놀이를 하다가 한번 올라 보았다며 정상이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다. 샌들을 신고 민소매티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짐보따리를 옆에 끼고 있었다. 한참 올라야 한다고 하니 그래도 한번 가봐야 겠다고 하는 중년부부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 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샌들탓에 아무래도 물집이 잡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길을 재촉한다. 아들아이는 암벽이 나올때 마다 밧줄을 잡고 먼저 내려가 제 누나며 엄마가 잘 내려 올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실은 별 도움이 안되었지만.... 배낭속의 물도 떨어져 가고 마침 목이 마르던 차에 축령산에 오로지 하나 있는 '암벽약수'를 만났다. 암벽약수는 말그대로 암벽에서 한방울씩 떨어지는 약숫물이다. 일부러 샘을 파지 않고 바위를 타고 떨어지는 약수를 받기 위해 반으로 자른 프라스틱병이 놓여 있다. 누군가 그렇게 물을 받아 두고 갔듯이 우리도 약숫물을 마시고 물이 떨어지는 자리에 다시 그릇을 놓고 내려왔다.
손길에서 손길로 이어져 마음으로 와닿는 약숫물이 유난스레 맛이 있었다. 축령산은 휴양림으로도 널리 알려져 입구쪽에 산림휴양관을 갖추고 있는데 그날도 마지막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도 복잡해 보였다. 엊그제 내린 비로 계곡물은 시원스럽게 흘러가고 늦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흐른다. 벌개미취 흐드러진 산길을 돌아 나오니 설핏 오후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대를 충족 시켜준 멋진 산행을 만끽하게 해준 서리산과 그리고 연이은 능선으로 이끌어준 축령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을 내려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