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그리 바쁜지 모르고 지나쳤던 아파트 화단... 그 화단에 봄빛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누렇게 퇴색되었던 황갈색 잔듸 틈새로 삐죽 삐죽 파란 새 풀들이 올라오고 그 사이 사이로 노란 민들레가 지천입니다. 노란 민들레의 영토는 나무아래고, 풀밭사이고 가릴것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왕성한 민들레의 번식력이 다른 풀들의 생장을 방해 했을 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일단 붙들어 맵니다.
아파트 라는 네모 반듯하고 삭막한 회색 공간, 자투리 땅인 그 화단에 이렇게 노란꽃 세상을 펼쳐 놓은 것만으로도 오늘은 황송 할만큼 곱고 예쁩니다. 게다가 민들레꽃 사이로 제비꽃 무리도 섞여 들어와 화단은 노랑 물감속에 보라색 점들이 촘촘히 박힌 모습이 여간 고운게 아닙니다.
움을 트기 시작한 봄풀들 속에 만개한 노란 민들레와 어울린 제비꽃을 한참 들여다 보다 여기 저기 땅위로 흩어진 목련꽃잎을 보았습니다. 지난주엔 목련꽃이 한창이었습니다. 보름 남짓 목련꽃은 크고 넓은 하얀꽃잎으로 우아하게 세상과 대면을 했는데 벌써 목련꽃이 지고 있었습니다. 목련의 하얀꽃잎은 딱히 하얀색이라고 하기에 그 빛깔이 아리송 합니다. 오히려 우윳빛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 때문인지 목련꽃잎의 흰색은 깨끗함과 우아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깨끗함에 우아함에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떠올리게 하는 숭고함마저 느끼게 하는 목련꽃은 그러나 그 종말은 안쓰러울 만큼 초라합니다. 따가운 봄햇살 속에서도, 가끔이 몰아치는 맵찬 꽃샘추위 속에서도 우윳빛 속살로 우아함을 자랑하던 목련도 어느순간 그 순결한 빛을 잃기 시작하면 얼마되지 않아 누렇게 변색되고 맙니다. 그마저도 둔탁한 소리를 내고 떨어질 때즈음이면 곱던 빛깔은 간데 없고 차가운 흙빛이 되어 가차없이 저를 지탱해 주던 가지끝을 떠나 땅으로 처박히고 맙니다. 흙빛으로 변한 꽃잎을 떨어뜨린 목련을 쳐다보면 웬지 안쓰럽게 느껴지는것도 목련의 우윳빛 꽃잎이 눈부시게 화려했기 때문입니다.
꽃이 피어 화려한 날을 뽐내다 꽃잎이 져서 땅으로 스미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겠습니다만, 우아하기까지 하던 목련꽃잎도 차가운 흙빛이 되어 자연으로 회귀하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다만... 목련은 아름다운 하얀꽃잎으로 하여 보는 이들에게 우상화가 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목련의 계절을 보내며 문득 옛 추억에 젖습니다. 여고때 우리학교 교화(校花)가 목련이었습니다. 우습게도 그 전에 나는 목련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없었을 뿐더러 목련이라는 이름조차도 생소한 나무였지요. 목련... 나무에 열리는 연꽃이라... 지금은 해석이 가능한 그 간단한 꽃이름이 대체 어디서 연유한지도 모른채 그냥 목련이라고 부르면 그 느낌이 참 좋았던 나무였습니다. 교화가 목련이었지만 교정엔 그리 목련나무가 많지 않았습니다. 서너그루, 많아도 다섯그루가 넘지 않은, 그것도 십년을 갓 넘겼을까 싶은, 그리 크지 않은 목련나무가 교정에 있었습니다.
그 목련나무에 꽃이 피는 사월이면 목련꽃을 보기 위해 점심을 빨리 먹곤 했습니다. 나와 같이 목련꽃을 좋아하던 친구와 약속이나 한 듯이 점심을 후딱, 먹고 목련을 보러 교정을 돌아다녔습니다. 몇번 교정의 목련을 보러 다니다
운동장 왼쪽 끄트머리 , 학교 뒷산과 학교와 조금 떨어진 민가로 가는 샛길 못미처 심어진 두그루의 목련만을
보러 가게 되었지요. 두 그루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도 좋았고 그곳에 있는 목련이 가장 크고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련꽃을 보러 가는 동안 그 친구와 우정도 목련꽃처럼 탐스럽게 부풀어 갔습니다.목련꽃 아래서 봄볕을 받고 서서 우리는 오래 오래 우정을 간직하자고 그런 눈빛을 주고 받기도 했지요.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복사꽃아래서 의형제를 맺었다 했습니다만, 목련꽃 아래에서 맺은 우정의 약속은 향기롭기 까지 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 친구와 떨어져 지내면서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목련꽃 아래서의 약속을 상기하면서... 봄날이면 더 열정적으로 편지를 쓰고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던 날도 결혼과 더불어 조금씩 퇴색이 되어 갔습니다. 화려한 꽃잎을 접고 누런 황토색으로 변색하는 목련꽃처럼... 목련꽃마저도 쳐다보지 않고 살았던 무딘 세월동안 두 아이의
엄마, 한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둘째 아이가 돌을 넘기고 혼자 걷기 시작하던 어느 봄날, 옆집 담장에 핀 목련꽃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잊었던 목련꽃 아래서의 약속도 새삼스럽게 기억을 헤집고 떠올랐습니다.
그간 소원했던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도 옆집 담장에 핀 목련꽃을 우연히 발견 하고서였습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편지 보내자고 목련꽃을 보며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는 좀더 자세히 목련꽃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꽃눈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과 꽃봉우리가 벙글어 지다 마침내 만개하는 우윳빛 목련꽃을.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 보자 어떤 봄꽃보다도 내 가까이서 또 먼저 크고 환한 꽃잎을 피우는 목련꽃의 생리가 신비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해마다 봄이 시작되면, 목련꽃이 필 사월이 기다려 지기 시작했습니다. 목련꽃의 만개를 기다리며 라디오에 엽서를 띄우기로 한것도 그즈음 이었습니다. 사월의 첫날,'사월의 노래'를 신청해서 듣곤 했습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목련꽃 지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테너 엄정행의 목소리도 좋았고, 메조소프라노 백남옥의 목소리면 더욱 좋았습니다. 그런 날들 속에서 우연히 친구의 편지를 받게 되면 아이손 잡고 목련꽃 아래를 찾아 들곤 했지요. 목련꽃 그늘아래서 친구의 편질 읽으며 행복했던 나의 사월의 기억은 지금은 또 기억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목련꽃이 지고 있습니다. 우리 아파트 화단에 핀 목련도 지난번 북한강가를 지나다 본 강변의 목련꽃도 벌써 '우아한 우윳빛 꽃잎'을 떨치고 있습니다. 목련꽃과 더불어 봄날도 가고 있습니다. 더디 왔다가 빨리 가는 봄날이 목련꽃의 낙화처럼 한없이 아쉽기만 합니다. 다행히 목련꽃나무 발치에 민들레와 제비꽃은 한동안 피었다 졌다를 반복하며 여름을 불러 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목련은 제 꽃잎과 같은 크고 푸르른 잎새를 피워 낼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