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이다. 어떤 영화는 후편이 전편과 아주 다른 이야기로 전개 되기도 하지만 이 두개의 영화는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에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나서 이 영화를 보면 더 좋을 것이다. 물론 꼭 비포 선라이즈를 보지 않아도 나름대로 교차 편집된 옛 기억들( 영화 속에서 실제로 보여준다) 을 통해서 전편을 유추해 볼수도 있으니 반드시 봐야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내 경우엔 비포 선라이즈에 대한 감동이 참 오래도 갔었다. 그리고 영화는 긴 여운을 남겼다. 기차에서 만난 제시와 셀린느가 미국과 프랑스로 각각 헤어지면서 베니스에서 6개월 후에 만나기로 하고 영화가 끝났기 때문이다.그것도 아무 연락처도 없이 무작정..그때가 9년전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들 두사람이 다시 만났건 만나지 못했건 간에 그것은 관객이 각자 알아서 생각할 일이었지 전편을 만들었던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다시 예전의 두주인공을 모아 후편을 만드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받았던 감동을 꽤 길게 간직한, 그래서 그들의 미래가 꽤나 궁금했을 사람들이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을 은근히 부추겼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니 제시역의 에단호크나 셀린역의 줄리델피 역시도 그들의 뒷얘기를 완성하고 싶어 감독과 다시 한번 어디에도 없거나 혹은 어디서든 만날수도 있을 그런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꾸밀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독과 두배우, 에단호크와 줄리델피가 다시 만나 서로의 대화를 적어가며 상황을 설정하고 만든 영화가 바로 '비포 선 셋'이다. 제목 그대로 해가 질때까지 두사람의 여정을 따라 가는 이야기로 해가 뜰때까지의 두사람의 데이트를 따라가던 전편 '비포 선라이즈'와 배치되는 배경속에서 영화는 진행된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람은 얼만큼 변화를 할수 있을까? 사고의 변화 혹은 정신적인 변화는 우선 차치하고 외모의 변화는?
이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세계 유수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인회에 초청을 받고 있는 제시(에단호크)의 얼굴에서도 세월이 도드라져 보인다. 우선 눈에 띄는건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다. 또 얼굴이 전체적으로 말라서 나이를 먹었다는 인상을 준다. 하긴 영화에서 교차편집되어 보여 주다시피 9년전의 제시는 풋풋한 대학생 같은 이미지 였다. 그때도 에단호크는 날씬 했지만 지금은 많이 말라 보인다. 살찐 모습보다는 그래도 낫지만 너무 마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연민 같은 것도 느껴진다.
제시는 지금 파리의 한 모퉁이에 있는 '세익스피어 서점'에서 독자들과의 만남을 갖고 있다. 그 자리에 셀린이 나타난다. 마치 어제 헤어진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제시를 바라보며 웃는 셀린의 얼굴에도 세월이 흔적이 비켜가지 않았다. 조금은 통통해 보일정도로 귀엽던 그녀의 볼이 움푹 패이고 전체적으로 마른 체형으로 변한 셀린은 이제 사회변혁을 꿈꾸는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둘은 마치 오랫만에 만난 친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반가워 하고 수다를 늘어 놓는다. 숨가쁘게 이어지는 수다들... 특히 셀린이 제시한테 할말이 많았나 보다. 그들의 대화에 기꺼이 끼어들며 즐겁게 영화를 감상했지만 그들이 만난 처음부터 끝까지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로 해서 모처럼 만에 다시 보게 된 두 배우의 얼굴 제대로 한번 쳐다 보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것이 조금 불만이었다. 살이 많이 빠졌지만 줄리델피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또한 에단호크에게는 여전한 매력이 있었다, 특히 그가 웃을때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를 다시 보는듯 했다.
셀린은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일, 하고 있는 일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의 일과 관련한 제반 환경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 그녀의 솔직담백한 수다 속에 가끔씩 제시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제시가 생각하기에 너무도 간결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반면 제시는 셀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6개월 후 베니스기차역에서 만나자던 9년전의 약속을 지켰는지 물어 본것도 제시다. 그날 약속을 지킨것은 제시였다. 셀린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이 었으므로 셀린이 약속을 파기했으나 그녀는 꼭 제시를 만나고 싶었노라 고백한다. 이제는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있는 제시는 하나 결혼생활이 불행하다고 털어놓는다. 아이는 한없이 소중하고 어떤 순간에서도 지켜주고 싶지만 아내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한다. 결혼생활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며 제시는 셀린을 바라본다. 어쩌면 감상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사람은 남자인 제시다. 셀린은 지나나칠 정도로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멋없어 보이기 까지 한다.
영화는 최소한의 장식만을 보여준다. 배경으로 보여지는 파리의 유서깊은 성당이며 세느강과 세느강을 아름답게 만드는 무지개형 다리들과 유람선과 공원과 고전양식의 집들이 영화를 유일하게 장식하는 것들이다.카메라 속으로 들어온 파리의 아름다운 풍광속을 두사람이 걸으며 쉴새없이 주고 받는 대화들이 영화의 전부다. 그들의 대화라고 해봐야 셀린이 하는 환경관련문제와 사랑과 성에 관한 이야기 , 그리고 각자의 아내와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는 어찌보면 진부할수도 있을 그런 얘기들이다.
저 많은 대사들을 어찌 다 외웠을까 싶을 정도로 두사람에게 할당된 대사는 넘칠 정도였다. 하지만 두사람이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처럼 파리의 거리를 걷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다. 이런 영화진행 방식이 조용하고도 신선하게 느껴졌다.은근하게 물결쳐 마침내 거대한 파도처럼 다가오는 매력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이 출연한 영화중 가장 많은 대사를 소화했을 셀린 역의 줄리델피는 노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아름다운데다 노래까지... 그녀가 부르는 왈츠풍 노래가 의미심장하다. 바로 제시와 셀린이 사랑한 이야기가 노래로 불려지기 때문이다. 셀린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무척 재밌어 하는 제시의 행복한 표정을 보며 이제 둘은 따뜻한 포옹을 하겠거니 싶은 대목에서 불현듯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끝이 얄미웠다. 아, 조금만 그들의 해후를 연장할수는 없었을까?그나마 제시가 끝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막이 오른다.캐스팅이 너무 단촐하다. 그럴수 밖에 줄곧 영화의 처음부터 두사람 밖에 안보였으니.. 그리고 따로이 해피엔딩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9년만에 만난 두사람이 영화내내 즐겁고 행복한 표정을 보여주었으니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내 입이 아프다. 내 다리가 아픈것도 같다. 그래서 나도 행복하다. 풋풋한 사랑도 아름답지만 오래 묵은 진득한 사랑도 나름대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