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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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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옛집, 그리운것들-


BY 빨강머리앤 2005-01-21

딸아이가 손꼽아 기다려온 겨울방학.. 아이는 서울사는 친구집에 놀러 갈 날짜가 확정되자 흥분된 나머지 잠을 못들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친구네 집을 방문 하기로 했던건 이미 약속된 일이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여름방학땐 그 친구네가 우리집을 방문했고 겨울방학땐 우리가 아이 친구네 집으로 가기로...

그날이 어제였다. 대한추위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기상청예보도 아이의 들뜬 마음을 가라 앉지 못했다. 아이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옛날 살던 동네를 다시 찾는 다는 생각에 어느정도 마음이 설레는것은 어쩔수 없었다. 5년여를 그곳에 살면서 알고 지낸 사람들, 주변건물 그리고 집앞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 그리고 비디오를 빌리러 갈때 여름이면 하얀별꽃을 피우던 산딸나무가 피어있던 길은 얼마나 그리웠던가.

눈이 살짝 내린 간이역엔 저녁기차를 타려는 몇몇의 사람들과, 늘 보아왔던 고즈녁한 풍경들 속으로 어둠이 서서히 내려 앉고 있었다. 저녁기차를 타보는 일은 또 얼마만인지...

익숙하지 않은 일을 앞에 둔 아이들의 표정엔 설레임과 이름지을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같은것이 숨어 있었다. 기차 도착 시간이 지체 되자 몇번이고 기찰구 밖을 바라다 보고는 다시 문을 닫고 들어 오기를 반복했다.

오랫만에 기차를 타본 아이들은 바라다 보이는 밖의 풍경이 신기하지 않은게 없는 모양이었다. 수없이 재잘대며 언제 서울에 도착할까를 걱정하던 아이들이 서울에 도착하자 너무 빠르다고 투덜댄다.

얼마만의 서울행인가? 다시 지하철을 옮겨타고 아이친구네 집, 옛동네를 찾아가기까지 세시간이 족히 걸렸다. 자동차로 왔으면 그 절반의 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도착했겠지만 기차타고  지하철 갈아타며 돌아왔던 길이 오히려 오래 남을 일이었다.

옛동네에 들어서니 벌써 사위가 깜깜한 밤이다. 가로등 사이로 드러난 동네의 풍경이 어제인듯 그대로다. 그 안에 새롭게 이름을 단 가게들도 보였지만 대체로 옛 모습 그대로의 풍경을 보며 아이들이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한다. 저곳은 비디오 가게였는데 분식집이 언제 들어섰지? .... 아파트 페인트칠을 다시 했나봐. 깨끗해 졌어요..

반갑게 맞는다. 오랫만의 만남이 쑥스러운지 아이는 친구와 잠깐 데면했지만 곧 서로를 얼싸 안으며 반가워 한다. 아이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먼길을 왔듯이 나 역시 아이친구 엄마와 오래 친구처럼 지낸 사이라 엄마들 끼리도 역시 반가운 맘은 마친가지다.

그집 아이둘 우리아이둘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동안 우리도 오랫만의 회포를 푸느라 입이 쉴새가 없었다. 연신 내오는 먹을 거리, 마실거리로 그 사이 사이로  질편한 수다가 이어졌다. 그 많은 말들은 못만난 동안의 그리움이 물꼬를 트는 일이었으라.

일찍 재울 생각은 없었지만 넷이 모인 아이들은 자정이 넘었는데 잠들 생각이 없다. 어른들의 호통에 마지못해 잠자리에 든 아이들을 재우고 우리는 맥주를 앞에 두고 비디오를 켰다. 구운 오징어 안주에 맥주한잔씩을 마시며 얘기를 겯들어 영화를 보는 맛도 색다른 묘미다.

영화는 기대한 것 보다 실망을 주었다. 한석규, 이은주 주연의 '주홍글씨' 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으나 그 색체감이 불분명한 영화였다. 한석규와 이은주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연출의도가 엇갈려 장르구분이 불명확해진 영화라고나 할까?

그랬으면 또 어떠랴.. 오랫만에 만나 맥주한잔 놓고 살아가는 이야기 잔잔하게 풀어놓을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으니...

다음날 느즈막히 일어나 역시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 야외스케이트장을 향했다. 이 야외스케이트장 역시도 참 생각나는 장소였다. 번잡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그곳에 거짓말 같이 고속도로 양옆으로 논들이 이어져 가을이면 벼익어가는 모습이 근사했는데 그곳이 '마곡지구'다. 도심에 남아있는 유일한 들.

그곳에 겨울이면 논에 물을 가두고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데 개발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올해도 어김없이 논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었다.

그곳 역시도 여전했다. 스케이트를 갈아신자 마자 얼음장으로 올라서는 아이들은 오랫만인데도 예전의 실력(?)을 잊지 않았다. 아이들 끼리 잘 타는 동안 이제는 비닐하우스 휴게소에서 엄마들만의 시간이 시작이다. 밖에서 보면 초라해 보일 정도인 비닐하우스가 실내는 꽤 근사하다. 비닐하우스 가운데 커다란 난로가 설치되어 있어 하우스안이 후끈하다. 아이들 기다리며 대기중인 엄마들은 난로 주변에 놓인 의자에 앉아 각자 가져온 간식들을 쇠난로 위에 얹어 놓는다. 우리는 호일로 싸놓은 고구마를 올려 놓았다. 여기저기서 꺼내온 간식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놀랄 정도다.

오징어에 쥐포에 감자도 등장하고 절편에 약식이 올려지고 그 사이로 길쭉한 가래떡이 올려졌다. 누군가  달걀이 그렇게 구워 먹을 생각을 했는지 한번은 펑,하고 폭발음에 깜짝놀라 보니 달걀이 익어 터져버린 것이다. 때문에 근처의 엄마들이 일어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문제의 달걀주인이 사과를 하고 파편(?)을 맞은 엄마쪽이 대충 넘어가 이 잠깐동안의 소란은 금세 잊혀지고...

스케이트 타던 아이들이 들락 거리며 엄마들이 구워 놓은 간식거리를 먹고 손을 녹이고 다시 스케이트를 타고는 했다. 그러기를 네시간, 이제 서서히 움직일 시간인데 여전히 아이들은 스케이트장에서 나올 생각을 아니 한다. 내년에 다시 올 기약을 하고 스케이트장을 빠져나오기 까지 아이들과 오랫동안 실랑이를 해야 했다.

다시 아이친구네 집에 돌아와 엄마둘은 김치부침개를 부치고 아이넷은 다시 저희들끼리 어울렸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사이 부침개 냄새를 맡았는지 아랫층에 사는 엄마가 올라왔다. 굴넣고 부침개 부쳤다고 한접시 가지고 올라온 그 엄마역시 우리 아이완 친구사이엿던 엄마다. 여자 셋이 모였으니 접시가 깨질만도 했지.. 아, 글쎄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있다가 그만 기차를 놓쳐 버렸다는 이야기...

기차표를 물리고 버스타고 집에 오면서 피곤했는지 아이들이 차안에서 잠이 들었다. 우리 없는 사이에 마석에 눈이 내렸는지 주변이 하얗다. 얇게 눈으로 덮혀 있는 집주변이 새롭게 반갑다. 하룻밤만 더 자고 가자며 조르던 아이들이 집에 오자 마자 한마디 한다.'역시 우리 집이 최고야'

그래도 나는 알것 같다. 이틀간의 짧았지만 긴 여정이 아이들의 생각 한자리를 차지하고 오래 오래 아이들로 하여금 곱씹게 할 추억으로 남아 있을 거란걸... 여름방학이 오기전에 다시 아이는 수없이 되물을 것이란걸....'엄마, 정민이 언제 우리집에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