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하, 일본에선 한류(韓流)가 열풍(熱風) 이란다.그 진원지는 겨울연가와 배용준... 급기야는 모 국영방송에서 일본인들로 구성된 겨울연가폐인들을 불러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일까지 있었다. 겨울연가의 어록을 인기순으로 살펴보는가 하면, 그 대사를 일본사람들이 직접 연기를 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뜨겁게 불고 있는 한류열풍을 눈으로 확인할수가 있었다.
조금은 유치해서 겨울연가를 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들의 열풍이 한편으론 의아스럽고 한편으론 이 기회를 통해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었음이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일본인들의 우리문화 배우기가 부디 한켠으로 쏠리거나 말그대로 열풍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류가 열풍인 가운데 티비에선 겨울연가가 다시 방송되고 있는 시각, 일본배우기의 차원이 아닌 그들의 문화의 힘에 대한 궁금증으로 일본영화를 보았다.가끔 일본영화를 보다 보면 야스나리의 설국으로 일본에 노벨문학상을 안긴 일본인들의 저력을 확인할때가 있다. 일본문화가 개방된지 그리 오래지 않고 영화또한 드러내놓고 볼수 있었던 시기가 짧았다라는걸 감안하고 내가 본 그리 많은 편수는 아닌 영화들 중,그중 괜찮았다싶은 영화들이 꽤 되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도 평단에서 호평한 작품이고 이 영화가 일본열도를 눈물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느니, 영화에 이어 동명소설로도 발간되었다는 화제작이었다.
제목이 암시하듯 '사랑이야기'인 이 영화는 남자주인공 사쿠(사쿠타로의 애칭)와 그의 첫사랑인 아키, 그리고 사쿠의 약혼자인 리츠코 세사람이 등장한다. 물론 주인공들 가족과 주변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들의 역활은 미미 하다. 단 한사람, 사쿠와 아키의 사랑의 매개역활을 해주는 사진관 시게아저씨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다.
영화는 사쿠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사랑, 슬프도록 처절한 사랑이었다. 어찌보면 뻔한 플롯으로 전개될수 있었던 백혈병에 걸린 여자아이와 그 여자아이를 사랑해서 그녀의 아픔까지 함께 하고 싶었던 소년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통속적이지 않으면서도 예쁘게 그려 냈다.
소년이던 사쿠는 같은학교에 다니는 아키를 만난다. 처음본 순간부터 둘은 운명적으로 끌렸다. 백혈병이 있는 아키, 그녀의 병을 알리가 없는 사쿠는 순정만화같은 사랑을 키워 나간다. 죽음을 앞둔 아키는 항상 사쿠보다 어른스럽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사쿠와 '꿈의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마도 아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사쿠에게 모든걸 다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키와 사쿠가 여름여행을 간곳은 해변이 아름다운 바닷가였다.이 바닷가 장면에서 둘은 가장 행복하다. 아직 아키의 병명을 모르는 사쿠는 어떻게 하면 아키와 키스를 할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런 사쿠를 바라보는 아키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졌다. 저녁놀 무렵, 옛 영화는 간데없고 스산한 폐가로 전락한 호텔에 들어가 둘은 창가에 나란히 앉는다. 바다가 서서히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그들이 앉아 있는 호텔 유리창 주변도 노을빛으로 물들어 간다. 아키가 손가락으로 그 창에 둘의 이름을 새긴다. 그렇게 이름을 적고 나면 그들의 사랑이 영원할 것처럼.
행복은 그것 까지 였다. 다음날 아키는 쓰러지고 곧바로 입원을 한다. 죽음을 앞에둔 아키를 바라보는 사쿠의 시선에 깊은슬픔이 담긴다. 아키가 죽기 전에 호주에 있다는 세상의 중심, 울룰루를 가보아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한다. 다행히 사진관 시케아저씨가 결혼사진을 찍어 주었고 관청에 가서 결혼확인서도 받아 냈지만 태풍이 불어 호주에 갈수가 없다. 다시 병원에 입원한 아키는 마지막을 보여주기 싫다며 사쿠를 밀어낸 다음날 죽고 만다.
'태풍'과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워크맨'은 영화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영화는 태풍소식을 전하는 일기예보를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사쿠가 아픈 아키를 데리고 호주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으로 갔던 날도 태풍이 불어 비행이 취소된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후 다시 공항에서 약혼자인 리츠코를 만나 진정으로 그녀를 받아 들이게 된 날도 태풍이 불었다.
아키는 연극의 주연을 맡아 줄리엣을 연기하지만 연극을 며칠 앞두고 그만 쓰러지고 만다. 아키는 머지 않아 죽을지 모를 자신을 줄리엣이라는 연극속의 인물과 동일시 한다. 그래서'잠자는 약을 먹고 죽은 척했던 줄리엣이 깨어나 로미오가 죽어 있는걸 볼때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궁금해 한다. 자신의 슬픈운명을 예감하는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쿠로 부터 멀어지려 하기 보다는 살아있는 동안 사쿠와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어한다.아니, 오히려 사쿠보다 적극적인 아키의 사랑이 참 예쁘다.
'워크맨'은 둘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영화에 줄곧 등장하는 워크맨으로 둘은 사랑을 키웠던 것이다. 워크맨 때문에 가까워 졌고,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했고, 또 워크맨 때문에 죽은 아키의 목소리를 17년이 흐른뒤에도 들을수 있었으므로..
사쿠와 아키와 리츠코의 관계는 다소 억지스러운 감이 있다. 아키가 입원한 병원에 어린 리츠코가 등장한다. 아픈 엄마의 병실이 아키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아키와 리츠코는 친해지고 리츠코는 기꺼이 아키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사쿠에게 전달하는 역활을 한다. 리츠코와 사쿠의 연결을 은밀히 암시하듯, 어린 리츠코가 사쿠의 높은 사물함에 테이프를 넣기위해 까치발을 할때 사쿠가 리츠코의 몸을 사뿐히 들어 올려 주는 장면이 있다.
어린 리츠코가 아키의 마지막 테이프를 전하기 위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 사고로 리츠코는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다. 아키의 테이프가 훗날 자신이 사랑할 남자, 사쿠에게 전달되는 것도 모른채.
결혼을 앞둔 사쿠가 고향으로 내려와 아키의 테이프를 들으며 회상을 하는 동안 리츠코는 아키의 마지막 테이프를 주인공에게 전해주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워크맨은 아키와의 행복했고 가슴아팠던 일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사쿠는 테이프를 들으며 쓸쓸해 하기도 하고 펑펑 눈물을 쏟기도 한다. 차라리 조금만 감정을 절제했더라면 배우의 연기가 더욱 돋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내가 흘릴 눈물을 저혼자 다 흘려 버린 배우에 대한 아쉬움에서다.
마침내 회자정리의 자리에 서서 이젠 보내야할 엣 사랑인 아키를 그녀가 생전에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호주 울룰루에서 보낸다. 바람에 흩어지는 아키의 뼛가루를 보며 사쿠와 리츠코는 슬픈듯 후련한듯 서로를 바라본다. 이젠 진정으로 안아주어야 할 사랑이 바로 앞에 있는 리츠코 임을 사쿠는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의 중심, 호주의 울룰루.. 실재한 공간일수도, 가상의 공간일수도 있는 그곳에서 바람으로 흩어진 아키는 진정으로 사쿠와 리츠코의 사랑을 축복해 주지 않았을까...붉은 평원'울룰루'에서 두팔을 벌려 사랑을 외치는 사쿠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영화는 막이 내린다,
또 한편의 괜찮은 일본영화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