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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철새의 영토


BY 빨강머리앤 2005-01-08

보름가까이 영하의 기온이어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유난스럽게 추위에 민감한 나 보다도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날밤 옷부터 챙겼다. 가장 가벼운 옷으로 가장 따뜻하게 입어야 했다.  따뜻한 물도 챙기고 장갑이며 털모자며 마지막으로 목도리까지 챙기고서야 잠이 들었다.

철새를 보러 금강으로 나서는 아침, 불현듯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인일인가, 싶어 창문을 열고 바깥의 기운을 감지해 보았다. 분명 전날과는 다른 포근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날씨가 풀린 것이다. 기온이 조금 오른 탓에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나왔다. 이건 분명 하늘의 선물이다. 룰루랄라, 콧노래 까지 나온다.

서둘러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하니 벌써들 준비물들을 싣느라 바쁘다. '고마리'회원 엄마들과 아이들 모두 서른명 남짓이다. 오늘의 철새여행을 준비한 엄마들, 고마리 회원들은 '환경을 생각하는 주부들'의 모임을 말한다. 아직은 환경에 대한 기초지식만으로 꾸려가는 초짜 환경모임. 겨울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자연공부를 떠나기로 한 것이 철새여행이다.

목적지는 금강.아이들은 처음 만났는데도 금방 친해져 차안은 수런스러워졌다. 그럴때는 잠시 가만 듣고 있는 것이 상책이다. 저희들이 지치면 그만둘 것이기에... 하지만 먼저 지친것은 엄마들이었다. 아이들은 목적지에 도착할때 까지 뭐가 그리도 할말이 많은지 시종 낄낄거리며 즐거워 했다.

철새를 보기에 앞서 미리 준비한 자료를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철새에 관한 기초지식을 알려 주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만든 자료를 묶으니 훌륭한 소책자가 완성이 되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겨울철새들의 종류의 다양성과 철새들과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소중한 지식을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열심히 설명하는 엄마들에 비해 서로 친해진 아이들은 저희들 끼리 노느라 엄마들의 말을 한귀로 듣는다. 

길이 막히지 않았지만 전라북도 군산에 위치한 철새도래지까지의 거리가 있어서 세시간이상을 걸려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철새구경도 식후경이라 미리 준비해온 김밥을 먹어야 하는데 날씨가 풀렸다고는 하나 겨울이어서 장소가 마땅치가 않았다. 마침 철새조망대 전망탑 한쪽에 탁자가 마련되어 있어 관계자의 허락을 받고 간단한 식사를 했다. 금강과 그 주변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다. 잽싸게 밥을 먹은 아이들은 500원 동전을 받아들고 조망대에 설치된 고배율망원경을 통해 철새를 관찰한다고 수선들을 피웠다. 수선을 피웠댔자, 500원으로 망원경을 볼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생각보다 철새가 많이 보이지 않았다.

11층이 있는 조망대에서 내려와 일층에 마련된 상설 전시장을  둘러 보았다. 여기에 마련된 자료를 통해 새들에 관한 이모저로를 비교적 상세히 볼수가 있다. 금강에 서식하는 새들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를 잘 정리해 놓았고 시청각실을 겸비해서 아이들이 철새에 대한 공부를 할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또한 겨울철새들을 박제 시켜 놓아서 철새를 보기에 앞서 철새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릴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철새조망대에 도착하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창오리 모양의 건축물이다. 저것이 뭘까 궁금해 하는 아이들이 제일 먼저 뛰어들어간 곳이기도 했다. '오리먹이가 되어 보자'며 오리 몸속으로 들어가니 오리의 내부구조를 하나 하나 만들어 놓았고 설명이 덧붙여 졌다.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고 내부기관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저 그 속을 한바퀴 돌아나오는게 재밌었나 보다. 자세히 읽을 생각은 없고 오리 뱃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깔깔댄다. 오리가 배아프다고 하소연 하지나 않았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조망대주변에서 볼거리들이 꽤 많아 시간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조망대 주변은 말그대로 인공의 구조물로 만들어진 갇힌 공간이었다. 새장에 갇힌 새들 위로 숲언저리를 가볍게 날아다니는 새들이 무척이나 자유스러워 보였다. 

드디어 진짜 철새를 보러 하구둑으로 갔다. 강바람이 제법 찼다. 물결이 잔잔히 일었고, 쉬고 있는 철새들은 사람들로 부터 멀찍히 떨어져서 저희들끼리 무리를 지어 몰려 있었다. 물결이 이는대로 몸을 맡기며 어떤 녀석은 부리를 깃사이로 파묻고 단잠에 빠져 있기도 하고 먹이를 찾느라 잠수를 하는 녀석도 있었다. 망원경을 가져 온 가족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돌려가면서 철새를 관찰했다. 우리나라를 찾는 겨울철새는 단연 오리과 새들이 으뜸이다. 가창오리, 청둥오리, 쇠오리, 흰빰검둥오리.. 원앙등등.... 그리고 겨울의 진객인 고니는 겁이 많은 탓인지 하구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구쪽 갈대숲에 모여있었다.

원앙이 참 이쁘다. 둘씩 짝지어 다니는 모습이 영낙없이 금슬좋은 부부같다. 철새가 물결을 거스를때마다 v자  모양의 물무늬가 그려졌는데 그 모습을 보는 일이 좋았다. 새들의 가벼운 날개짓이나 물무늬를 만드는 이동반경을 보고 있으려니 '평화'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새들이 만들어 내는 평화라는 단어를 깊이 새겨 넣었다.  회랑을 따라 철새들을 관찰한다. 걸어가다 보니 테마공원도 보인다. 새모양의 솟대들이 하늘을 향해 우뚝하다. 솟대를 쳐다 보려니 저희들 끼리 무리를 지은 새들이 기억자 모양을 만들어 공중을 선회하다 사라지기도 한다. 찰칵.. 새들의 몸짓을 담고 싶어 카메라를 들이대면 언제나 새들은 저만치 멀어지곤 했다.

오랫동안 물위에 떠있는 새들은 평화로운 쉼을 했다. 사람에 비해 크게는 40배 이상 청각이 발달한 새들은 소음에 민감하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특별주문을 해야 했다. 한시도 가만 있지 않으려는, 새들의쉼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

청둥오리, 가창오리, 원앙이 들이 서로의 영역을 드나들며 먹이를 찾고 둘씩 짝을 지어 유유히 물을 헤엄쳐 나가는 모양을 되풀이 한다. 멀리서 날개짓 하는 고니는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좀체 나올줄 모른다. 사람이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는 것도 같다. 저희들의 공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고니들, 아쉽지만 멀리서 망원경으로만 그 모습을 훔쳐볼 뿐이다. 하얗고 긴 목을 안으로 굽혀 아름다운 곡선을 완성하는 고니들의 모습이 우아하다.

서쪽 바다 멀리서 조금씩 일몰이 시작되려는지 하늘빛에 엷은 주홍빛이 섞여 든다. 회랑을 한바퀴 돌동안 회원두분이서 어묵을 끓여 놓았다. 일회용은 사절, 각자 가져온 그릇에 퍼담아 각자 가져온 숟가락으로 따뜻한 어묵을 먹었다. 다시마, 멸치, 무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국물이 진국이다. 밖에서 먹어서 그런지 정말 맛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저녁이 되자 차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등지고 훌훌, 맛난 국물의 어묵을 먹는 동안 '맛있다'는 감탄사가 연신 터져 나온다. 어묵국물이 너무 맛있어 겨울강에 가면 꼭 어묵을 끓여 먹으리라 다짐을 했다.

이번엔 나포십자뜰이다.. 이름이 생소하다. 매우 시적인것도 같다. 이곳이 오늘의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곳이다. 고대하고 기대하던 '가창오리의 군무'를 볼수 있는 곳이다. 가창오리는 하루 두번의 멋진 군무를 펼쳐 보인다. 일출(日出)과 일몰 (日沒) 무렵이다.

일몰 무렵이 가까워 졌다. 서쪽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날씨가 흐린탓이었는지 일몰은 선명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오늘 여행에서 장엄한 일몰도 보고 그 일몰을 배경으로 가창오리의 군무도 볼수 있기를 바랬는데.. 욕심이 지나쳤나 보다. 제법 사위가 어두워 가는데 오리들은 조금씩 사구쪽 갈대숲 근처로 이동해 갈뿐 날아오를 생각이 없었다.

어두워 지는 둑을 따라 군무를 보기위해 오리를 더 자세히 볼수 있는 쪽으로 이동해 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고요한 새들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말을 아껴야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새들도 조금씩 뒤로 물러 난다.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새들은 별 움직임이 없다.오늘은 저 새들이 날아오를 생각이 없는가? 걱정스러웠다. 이른 겨울해는 벌써 서산으로 떨어지고 어슴프레한 어둠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새들이 날아오른다고, 그간 애써 말을 참고 있던 아이들이 소리쳤다.

일제히 날아올랐다. 한꺼번에 날아오른 새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함께 움직였다. 앞선 무리가 오른쪽에 있는 야트막한 산쪽으로 움직이자 새떼들이 한몸인양 느리게 산을 향해 움직이자 새의 무리들이 만들어 내는 모양이 '새자신'이었다. 다시 흩어질듯 모아져 왼쪽으로 일제히 방향을 틀어 또다른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일사분란하여 마치 누군가 전두지휘를 하는듯도 했다. 장관이었다. 사위가 어두워서 선명하게 볼수 없는게 흠이었지만 ...

새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가기에 앞서 새를 보러온 사람들에게 멋진 춤사위를 보여 주었다. 밤이 되어 잠자러 가는 새들은 내일 아침, 태양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한번 한꺼번에 날아올라 멋진 군무를 출 것이다. 겨울동안 그렇게 새들은 아침과 저녁 춤을 추고 잠자리를 가는 멋진 장관을 연출할  금강의 철새 도래지.. 강하구와 습지, 갯펄과 평야지대에 서식처를 마련한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 한다. 그런 철새들의 서식지가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로 조금씩  줄어 들고 있다니 안타깝다.

철새를 보고 온 아름다운 여행이 오랫동안 가창오리가 일제히 날아오르던 장면을 기억하게 한다. 밤이 늦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눈을 만났다. 유난히 눈이 없는 올 겨울, 하늘 하늘 눈이 내려서 여행을 대미를 장식해 주었다.  금강에서 데려온 눈소식으로 온세상이 하얗게 덮이는 상상을 하며 아이들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