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이었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시간개념에 무뎌 있던 차였다. 라디오에서 문득, 오늘이 동짓날이라고 하니 그때서야 정신이 좀 들면서 '동지팥죽'생각이 비로소 났던 것이다.
살림에 별 재미를 못 부치고 사는 내가 그래도 동짓날은 대체로 챙기는 버릇이 있는것은 아무래도 할머니와 엄마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어릴때 동짓날을 그냥 지나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때 해마다 빼놓지 않고 동짓죽을 먹고 자란 탓인지 지금도 동짓날 팥죽을 안먹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서 애써 동짓날 팥죽 만드느라 하루를 소비하면 그것도 보람이곤 했었다. 내가 팥죽을 만들지 못하면 사다가 먹는 한이 있더라도 꼭 동짓날을 챙기곤 한다.
오늘날 동지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버렸지만 예전엔 동지가 곧 새해의 시작을 의미했다고 하고 그런 의미로 죽을 쑤어 이웃끼리 나눠 먹던 세시풍속이 오늘날 '동지팥죽'의 유래라고 한다. 그런 탓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동짓날이면 새알심 곱게 빚어 팥을 걸래내어 동짓팥죽을 쑤었던 이유는..
라디오에서 '오늘이 동짓날'이라는 멘트를 듣는 순간 갑자기 팥죽을 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팥을 꺼냈다. 지난 가을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팥이 냉동실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붓고 팥을 삶았다. 햇살에 꽁꽁하게 마른 팥이 무르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은근하게 뭉근하게 끓어 오르는 팥이 팥특유의 고소하고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한시간 하고도 반시간이 더 걸려서야 팥이 다 익었다. 더러는 팥알갱이채 죽을 끓이기도 하고 팥을 믹서에 갈아서 죽을 만들기도 한다지만 친정엄마가 했던 대로 팥을 걸러 내야 더 부드러운 맛이 난다.
커다란 냄비위에 체를 받치고 뭉근하게 잘 익은 팥을 쏟고 손으로 주물주물 팥물을 내린다.꼼꼼하게 팥물을 내리면서 물을 붓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팥껍질만 남을 때까지 그 작업을 해야 한다.곱게 내려앉은 팥앙금이 물과 섞여 부드러운 팥국물이 완성되었다.
이번 동지가 '어른동지'(?)'애동지'인지 잘 모르겠으나 새알심을 할 찹쌀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으니 밀가루를 꺼내 팥칼국수를 할 생각이다. 밀가루 반죽을 넉넉히 한다. 딴에는 반죽을 다 쓰고 남으면 아이들 놀이감 하라고 던져줄 생각이었는데 결국엔 다 쓰고 말았다.
벌써 시간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각, 아들녀석이 올 시간이다. 녀석이 오면 밀가루 반죽을 같이 하면 좋으련만 오늘따라 늦는 녀석이 야속하다. 꽁꽁 주무르고 탁, 탁 치대서 쫄깃한 맛을 낼수 있게 반죽을 한다. 반죽한 밀가루를 적당한 크기로 떼어서 둥글게 만든 다음 밀대로 넓게 펴는 일은 오랫만이라 쉽지가 않다. 아이들이 보았으면 재밌다 할 칼국수 만드는 일을 혼자 낑낑대며 하려니 관객없는 무대에서 혼자만 쇼를 하는것 같아 영 재미가 없다.
얼추 국수모양이 나온 칼국수를 팥물이 펄펄 끓고 있는 냄비에 퐁당 밀어 넣는다. 보글거리며 끓어 오르는 양이 제법 입맛을 다시게 한다. 다른 양념같은거 하나 필요없다. 담백한 맛이 좋아 설탕도 사양이다. 그냥 소금으로만 간을 하고 먹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맛난 '팥칼국수' 다.
'애동지'와 '어른동지'가 따로 구분되어 팔죽도 새알심이 들어가느냐 안들어 가느냐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새알심팥죽 보다 '팥칼국수'가 훨씬 맛나다. 찐득거리는 찹쌀 새알심을 삼키면 목이 간지러워 하나먹고 말게 된다. 게다가 찹쌀새알심을 먹고난 후 목이 간지러운 증상이 꽤 오래 가는 것이었다. 단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습성탓에 단팥죽 역시 내 체질이 아니다. 단팥죽을 먹을때 그 순간의 달콤함에 비하면 뒷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배는 왜그리도 불러오고 그 거북한 느낌은 또 얼마나 오래 가는지...
그래서 천상 나는 소금으로만 간을 한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살아있는 팥칼국수 체질인 셈이다.
그런 팥칼국수가 한솥가득 끓여졌다. 팥죽을 다 끓여 놓고 기다리는데도 아들녀석( 딸아이가 오려면 한참 멀었고)은 집에 오지 않는다. 같이 먹어야 맛이더냐, 에라 모르겠다, 나부터 시식이다.. 뜨건 팥죽을 한그릇 떠서 후후 불어가며 훌훌 먹는맛, 꿀맛인들 이보다 맛날까 싶다.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팥을 넣은 탓인지 어릴때 먹던 딱, 그맛이다. 그러니 한그릇 가지고는 간에 기별이나 갔을 려구.. 두그릇째 맛나게 비웠다. 그때서야 아들녀석이 들어온다. 친구와 놀고 왔다는 녀석이 급식은 먹었겠지만 노느라 배고 팠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식기전에 팥죽 한그릇 퍼담아 먹어보라니 '엄마도 팥죽 끓였어. 학교 급식으로 팥죽 나와서 많이 먹었는데'한다. 엄마가 쑨 팥죽을 맛나게 먹는 아들녀석을 보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만 나는 김이 새고 만다.
동짓날이라고 팥죽을 끓여 아이들 급식으로 내놓은 학교측의 마음씀이 고마운 한편으로 그것 때문에 내가 끓인 팥죽을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조금 야속한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냄비가득 팥죽을 끓여 놓았으니 마음이 든든해지는 느낌이다. 마침 학습지 선생님이 다녀가는 날이라 공부끝난 선생님께도 동짓죽을 대접했다. 요즘도 집에서 동짓죽 끓이는 사람 있냐며 대단히 신기한듯 바라다 본다. 안그래도 동짓날인데 동짓팥죽도 못 먹고 지나가나 싶었다고 하셨다. 진짜 맛있는지 어쩐지 모르겠으나 맛나게 한그릇 비워주니 보는 내가 기분이 좋다.
조금 부지런 피워 지인들에게 동짓죽을 퍼다 주었어야 하는데 급히 서두르며 출근하는 바람에 저녁때 식구대로 먹고 났는데도 많이 남았다.이제는 국수가 불어서 나눠 줄수도 없고,별수 있나 먹을 때까지 줄창 팥죽을 먹는 수밖에...^*^ 경제 좀먹는 나쁜 악귀일랑, 팥죽 먹고 나가 떨어지고 , 네살박이 어린아이가 배곯아 죽었다는 흉흉한 뉴스일랑 팥죽먹고 나가 떨어지고...새해엔 부디 활짝핀 경제소식, 훈훈한 세상소식이나 좀 전해 다오. -2004년 동짓날에-
200번째 발자욱을 비로소 찍는다. 뭔가 특별한 의미와 감동을 담은 글을 200번째 쓰리라,다짐을 오래동안 해 왔건만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잡문이 되어 버렸다.
고개 하나 올라온 심정이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저 앞에 더 높은 산봉우리가 우뚝하다.
200번째, 발자국 찍는다.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