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546

어떤 이별


BY 빨강머리앤 2004-11-25

처음부터 그 사장님이 좋지는 않았다. 평범한 인상이었으나 사십대초반의 남자치고는 말이 많은게 맘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장님이 하는 말이라고는 다소 부풀려 지고 과장이 심한 투의 말이였기에 그의 말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중언부언 한가지 일에 말을 덧붙이길 좋아하는 그사장님과 마주 치는 일이 그래서 탐탁치가 않았는데 자신의 일에나 열정을 쏟을 일이지 저리 밖으로 자주 돌아다녀서야 어디 일이 제대로 굴러 가겠나 싶은 우려감 마저 줄 정도로 이일 저일에 참견을 하는 양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치는 그는 인사성이 지나치다 할 정도로 밝아서 주변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일단 그와 말이 시작되면 절대 짧게 끝나는 법 또한 없었다. 그는 아줌마에 견줄만한 수다쟁이 아저씨였던 것이다.

그 사장님은 다름아닌 같은 상가 이층 건물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사장이다. 아니 운영했던 사람이다.

말이 많은데다 말을 함부로 하기 까지 하는 그를 나는 오히려 피해 다닐 정도가 되었는데 정작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이야기 나누는걸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악의가 있었던것은 아니다.같은 말을 조금 부풀려 크게 얘기했을뿐,전혀 아닌 얘기를 하는법은 없었다.

그의 지나치게 밝히는 인상성 또한 주변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같은 구실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어느순간 그의 인사가 없는 날이 오히려 허전할 정도가 된 이후로 조금씩 우리는 사이좋은 이웃사촌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주말이면 그가 운영하는 호프집에 들러 스스럼 없이 대화도 나누고 요즈음 경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었다.경기 여파를 타는지 그가 운영하는 호프집이 늘상 한산했던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우리 부부가 그곳에서 마시는 맥주가 기껏해야 2000cc도(?) 안되는 양이고 그곳에서 파는 안주 또한 저렴하고 서민적인 안주들인 까닭에 그의 매상에 별 도움이 되어 주지는 못했을 줄로 안다. 하지만 워낙에 사람을 좋아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호프집 사장님이었고 술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 나누는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기에 그렇게 자신의 매장을 찾아주는 것에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시할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냥 그런 시간들이 참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호프집의 성격상 저녁부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해가 뉘엿거리기 시작할 즈음 그는 안주거리용 시장봉지를 들고 출근을 하고는 했다. 가끔은 일부러 찾아와 봉지 하나씩을 놓고 가곤 했다. 그 봉지엔 상추가 한아름 들어 있기도 했고, 잣이 한웅큼 들어 있기도 했다. 밤을 땄다고 햇밤이 한봉지 들어 있기도 했고, 올해 첫무를 수확했다고 푸른듯 새하얀 무를 몇개  건네주기도 했다. 어떤날은 저녁참에 수제비를 끓여 내오기도 했는데 그런날은 그의 아내가 함께 일을 하는 날이었다. 

구수한 부산사투리의 인정많은 그의 아내를 보고 있자면 그가 참 장가를 잘 들었다는 생각이 들곤 할 정도로 그의 아내는 수수하고 알뜰하고 보기드물게 착한 여자였다.

이곳에서 한시간여의 시골이 집인지라 낮동안 시간을 내서 농사도 병행한다는 그였다. 가끔은  늦게 일을 시작하는 날이 있곤 했는데 그런 날은 영락없이 벼를 심는 날이거나, 논에 물을 대는 날이거나, 농약을 뿌리는 날이거나, 벼를 수확하는 날이고는 했다.

그런 그는 매상이 시원찮은 호프집 때려 치우고 농사나 지을까 보다고 혼잣말처럼 되뇌이곤 했다. 경기한파는 참 오래도 갔다. 호프집을 개장한지 이년, 일년동안은 그나마 유지를 하고 조금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고 하는데 일년을 넘기자 마자 경제 한파의 여파로 도무지 장사가 점점 하향곡선을 긋는다며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부쩍 담배를 물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자주 띄였다. 항상 밝은 인사로 주변을 밝게 해주던 그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장사란 이윤을 남겨야 하는 법인데 이윤은 커녕 현상 유지도 어렵다고 한지 몇달후, 이젠 현상유지까지 어렵게 되었다고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말이 나온게 지난여름이고 보면 어떻게든 권리금이라도 챙겨 그만둘 생각을 한것도 그때부터 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동산시세가 등락을 거듭하면서 불안정할때와 맞물려 이젠 도저히 버텨낼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의 호프집을 내놓았을땐 권리금마저도 포기를 해야 했던 모양이다.

'조금 더 버텨보시지 그러세요'라는 권고는 아무 위로도 되어 주지 못했다. 상가주인은 임대료를 깍아 주겠다는 파격제안까지 했던 모양인데 그의 생각을 바꿔 놓지 못했다. 나라 경제사정이 이렇게 한 개인개인을 흔들고 있다는게 비로소 피부로 느껴졌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고 했지만 그많은 경제인들, 그많은 정치인 관료들이 합심하면 못할것도 없을 것 같은데 어찌하여 우리나라 경제는 맨날 이리 바닥을 향해 지리멸렬하게 하락하고 있는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시골집엔 올해 초에 늙은남편을 떠나 보낸 늙은 노모가 있을 것이었다. 또한 그의 어린딸들은 새벽에서야 돌아온 엄마아빠의 자는 얼굴을 아침에서야 보고는 했을 것이었다. 몇마지기의 논과  집주변의 밭뙤기 만으로 두 아이를 키울수가 없으니 노가다라도 뛰어야 할 모양이라고 쓸쓸하게 웃던 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의 아내의 눈빛을 잊을수가 없을것 같다.

그들은 얼마전 끝내 호프집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가재 도구를 챙겨 떠났다.줄것은 없고 쓸만한 것을 찾다 보니 종이컵 한박스가 남았다며 박스를 건네고 갔다. 마지막날, 그는 평소에 자신의 매장을 자주 찾아주었던 외국인 노동자들을 몇명 불렀었다. 그들에게 맥주를 대접하며 그동안의 감사를 대신했다고 했다.

그의 낡은 지프차 가득 가재도구를 싣고 떠나는날, 나는 그의 아내 손을 오래 잡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건 아닌것 같았던 묘한 슬픔이 그들과의 이별을 한없이 안타깝게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두사람, 저녁부터 새벽까지의 맥주집 운영이 결코 쉽지 않았을 두사람이 그런 모습으로 떠나는걸 지켜보는 심정이 참으로 착찹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래서 잡은 손을 쉽게 놓을수 없었다. 나의 감정적인 눈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겠기에 나오려는 눈물을 감추고 '열심히 살아서 다시 여기서 볼수 있었으면 한다'는 상투적인 인사를 건넸다.

'여름에 놀러 오세요, 상추가 크면 상추도 따가고 유명산 올때 꼭 들러 가세요' 그이가 여전히 예의 그 밝은 웃음을 띤채로 차에 올랐다. 그 웃음에도 쓸쓸함이 언듯 스쳐간다. 왜 쓸쓸하지 않겠는가. 농사철도 끝난 겨울, 그가 얘기한 대로 노가다 일도 겨울이라 있을까 걱정하는 아내의 말이 마음에 걸렸을 그였다.

'우선은 겨울동안 쓸 나무해다가 장작을 팰겁니다' 그들은 그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것이 두주일 전의 일이다. 벌써 아득하기도 하고 엊그제 일같기도 하다. 그간에 정이 많이 들었는지 그가 운영하던 호프집을 바라보면 불현듯 그와 그의 아내 얼굴이 떠오른다.그것도 늘상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이제는 겨울동안 쓸 장작을 다 팼을까나... 부디 그들이 원하는 희망을 향한 의지가 추운 겨울에도 빛을 바래지 않고 꽃피는 봄날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날이  돌아오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