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다. 마음이 아프더니 몸도 따라서 아팠다. 무기력증... 쉼없이 잠이 쏟아지고 나는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 되어 아무 생각없이 허둥지둥 일상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식욕은 왕성하여 오히려 밥도 더 잘 먹고 저녁을 먹은후 야식까지 챙겨 먹었다. 그런 다음날은 어김없이 눈이 붓고 몸이 부어 퉁퉁,,., 마치 전날 펑펑 눈물이라도 흘린 사람처럼 그렇게 눈자위가 부어 내가 거울을 보다가 정말로 펑펑 울고 싶어 질정도로 내 몰골을 보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그러고서도 저녁이면 다시 잠들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그렇게 먹어야 내 안에 있는 고통의 순간이 멈춰 질 것처럼 꾸역꾸역 먹을것을 식도로 밀어 넣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아무생각이 없는척 했지만 실상은 마음이 한정없이 쓸쓸하고 삶은 비루한것만 같아 견딜수가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마음들을 글로 적어 내려가면 어쩌면 마음이 뻥 뚤려 줄지도 모를것 같았으나 쓰는 일조차 내 마음대로 되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괴로웠다, 아니 그것 때문에 괴로움은 새로운 옷을 입고 나를 죄여 오는 것만 같았다.
생각만큼 되어지지 않는 일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싶지가 않아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그래, 좋아하는 영화를 보자. 그러면 마음이 환하게 , 쌀이 씻기며 물과 평화롭게 화합하듯 그렇게 내 마음도 몸과 부드럽게 섞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몇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빌려 놓고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같지 않아 눈커플 위로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무슨일인가, 자도 자도 잠이 와서 나는 좋아하는 영화를 끝까지 볼수가 없었다. 다만 감성은 마르지 않았는지 계절이 계절인지라 낙엽지는 길을 걸어가다 물큰 눈물이 솟는걸 어쩔수가 없었다. 단풍으로 화려했던 잎들이 여기저기서 지고 있었다. 아침마다 문을 열면 아름답게 시야를 채워주던 앞산의 단풍도 지고 이제 산은 겨울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잎을 떨어뜨리고 추운 겨울을 나는 숲은 얼마나 처절하게 아름다운가. 어쩌면 가장 풍요로운 계절을 나고 있는 나는 그것들 앞에 한없이 부끄럽고도 슬펐다.
먼산에 잎을 떨어뜨린 숲이 엉성하게 서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처량해 보이기도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섭리 이므로 나는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내 마음이 허전한 까닭에 늦가을의 숲이 참으로 쓸쓸해 보이는 나날이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길에 채이는 주홍빛 단풍을 떨어뜨린 벚나무 가지, 몇개만 남아 바람에 팔랑이며 애처로운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나뭇잎도, 바람이 불때마다 우수수 황금빛 잎새를 날리며 제법 화려하게 생을 마감하는 은행잎 조차도 올가을 따라 참으로 쓸쓸해 보이는 것이었다.
아픈 마음이 독한 감기를 불러 들였다. 머리가 아프고 여전히 잠이 쏟아지고 편도가 부어 올라 목소리는 잠기고 말하기가 곤란하였다. 일년이 가야 제대로 감기 한번 앓고 지난 적이 없었는데 이 낯선 증상 앞에서 나는 그저 침묵을 할수 만은 없었다. 일상은 여전히 똑 같이 돌아가고 나는 직장에도 나가야 했다. 내가 아픈 것과는 상관없이 하루는 시작되었고 일상은 반복되었으므로 할수 없이 잠긴 목을 풀어 주기 위해 병원을 찾았고 약을 챙겨서 먹었다. 약이 어느정도 더 이상 나쁜상태로의 진행을 막아주었으나 잠긴 목소리는 쉬 돌아올 태세가 아니었다. 먼저 감기를 앓았던 사람들은 최소 일주일은 그렇게 목감기로 고생할거라고 그랬고, 의사역시도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라며 당분간 목을 보호해주면서 병원엘 꾸준히 다니라고 그랬다.
그것이 엊그제 일이고 오늘은 날씨가 포근한 가운데 이미 예정되어 있던 대로 광릉수목원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숲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잘 보존된 숲인 광릉수목원은 평일만 개장하는 관계로 진작 부터 가보고는 싶었던 곳이었으나 아직까지 못가본 곳이었다. 벌써 잎이 지고 숲은 이미 초겨울의 정서를 보여줄 것이었지만 그래도 광릉숲이 궁금하여 마음이 설레였다.
광릉숲에는 가을햇살이 따사롭게 내리고 있었고 평일인데도 적잖은 사람들이 수목원을 보러 찾아온 것이 눈에 띄였다. 늦가을 햇살이 따사로워 어쩐지 내 마음도 덩달아 포근해 지는 느낌이었다. 숲과 더불어 살아서 인지 인상이 꼭 우리 들꽃 같으신 분이 숲해설자로 나서서 잎이 진 광릉숲을 찾아온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입구쪽에 잎을 반쯤 떨군 메타세콰이어가 우람하게 서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낙엽송은 입을 다 떨어뜨렸는데 여즉까지 남아 붉은듯 노란잎새를 달고 있는 우뚝한 메타세콰이어를 보니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이어 길'이 생각났다. 숲에 들어오니 비로소 마음이 포근해 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사랑스러워 진다.
잎떨군 나무들 사이로 늘푸른 나무인 상록수들이 유독 눈에 띈다. 산책로 양쪽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회양목의 윤기나는 작은 잎새들이 앙증맞게 이쁘다.
천연기념물인 장수하늘소의 서식지를 제공한다는 서어나무도 그 이쁜 노랑잎새를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 서있다. 그래도 저 서어나무 수피 사이 사이에 장수하늘소 애벌레를 품고 숲은 아름다운 비밀을 키워갈 것이다. 겨울에도 여전히 숲은 그렇게 살아 숨쉬고 있겠지.. 우리나라 유일의 크낙새 서식지 이기도 했던 이 수목원에 어느사이엔가 크낙새가 멸종의 위기를 맞았단다. 광릉숲을 지나는 도로가 개방되고 그곳으로 차량의 이동이 있고 밤에 켜둔 가로등이 그 원인이라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편리함 대신 자연이 하나둘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왜 깨닫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 자동차 배기가스로 하여 고사목이 되어가는 우람한 전나무의 현실또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가장 예쁜 단풍빛깔을 보여준다는 복자기나무도 잎새하나를 남겨두지 않고 다 떨구었고.그 잎이 맛있어 나비애벌레들이 많이 산다는 풍게나무가 생소했다. 나비를 많이 보고 싶거든 정원에 풍게나무 한그루 심어놓으라고 일러주던 말을 오래 기억하련다. 나중에 마당이 있는 집에 살거든, 그 마당 한켠에 풍게나무 한그루 심어 두리라...잎진 나무 사이로 여즉 붉은 열매를 달고 새들을 불러 모으던 낙상홍도 반갑고 수묵산수화에 흔히 등장하는, 잔가지가 멋드러진 커다란 비슬나무도 만나고 보기만 해도 듬직한 구상나무도 보았다.
숲이 울창하고 아름다워 일제시대에도 손대지 않았을 정도라는 광릉에는 그렇게 희귀하고 아름드리 가지를 자랑하는 나무들로 빼곡했다. 그곳에서 자라는 소나무만도 다양한 종류를 자랑하고 길고 어려운 이름의 다양한 향나무 종류들 하며 그 사이로 사람구경에 나선 곤줄박이를 만나기도 했던 아름다운 여정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 아쉬울 정도였다.
숲해설을 해주신 분은 마지막 코스로 자작나무 앞에 섰다. 잎을 떨군 하얀수피의 자작나무는 추운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나무지만 북방계기마민족이었던 우리민족과 아주 관련이 깊은 나무라고 설명하셨다. 그런 까닭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작나무 라면 '무조건 좋아하는'습성이 있다고 덧붙이셨다. '화촉'을 밝힌다고 할때의 화字가 자작나무를 뜻하고 팔만대장경을 새길때도 역시 자작나무가 쓰였다고 하니 자작나무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광릉숲을 한바퀴 돌아보며 자작나무의 기운이 내게 닿았던 탓이었는지, 여전히 푸른 잎새로 늠름하게 서있던 구상나무의 기운을 받았는지 어느순간에 아픈 기운이 말끔해지는 느낌이었다. 목소리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기분이 다시 맑아지는 느낌, 기분이 좋아져서 수목원을 돌아 나오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나는 자연인이다' ...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던 마음을 숲이 알아 준것일까? 숲에 들어 마음이 환하게 열리고 몸은 다시 생기로워짐을 경험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