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문득 쓸쓸하여서 오늘은 영화를 보아야지 생각했다. 퇴근길에 비디오 가게에 들렀으나 마땅한 영화가 들어와 있지 않아 망설이다, 예전에 한번 봐야지 했던걸 미뤄둔 '영어완전정복'을 집어 들었다.
어느 평론가가 좋은작품으로 소개해준 영화였지만 영화제목이 맘에 들지 않았었다.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뒤로 미뤄둔 영화인걸, 여배우 이나영에 대한 신뢰감 하나를 믿고 영화를 선택했다.
과연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지금까지 좋은영화를 꽤 많이 만났으나 이 영화는 또 나름대로 좋아서 내 좋아하는 영화목록을 수정해야 했다. 내용이 있어 좋았고, 재미가 있었고, 이나영의 푼수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주제가 있으면서 재미있고 연기력까지 받쳐주는 우리영화가 점점 많아져 관객인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사회는 목하 외국어 열병에 사로잡혀 몇십년을 열에 들떠있다. 강남의 한학부모 집단은 영어발음에 유리한 혀를 만들고자 유치원 아이들을 수술대로 보내고 있을 정도다. 이 기가막힌 현실을 뉴스로 보면서도 도무지 현실인가 싶었다. ( 이 장면은 다른영화, 여섯개의 시선에서 도용되었다는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영어완전정복의 열망에 오롯한 헌신을 보이는 현실에서 그렇다면 나는 얼마만큼 자유로운가,자문해 본다. 나또한 결코 아니라고 할수가 없을 것이다. 비록 요란스럽게 일찍부터 학원행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아이들에게 영어학습지를 안겼었다. 생소한 다른나라 언어를 공부하게 하면서도 싫다는 아이들을 이해하기 보다 야단을 쳐가면서 까지 분량을 소화하게 만들곤 했었다.
왜 영어를 공부해야 하냐고 묻는 아이에게 '지금은 세계화 시대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아이들은 선뜻 그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왜 한가지만 하느냐고 묻는 학습지 선생한테는 '그냥 우리아이가 영어에 흥미만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요'라고 얘길 했다. 하지만 놀이가 아닌 이미 공부가 되어버린 영어에 흥미를 느끼는 일이 어디 쉽던가.
생각해보면 우리역시도 오랜시간동안 영어공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시간을 투자한 만큼 영어에 흥미를 느끼고 일상에서 영어를 써먹을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생긴다. 왜 그렇게 영어를 말하는것이 어려운가. 또 왜 우리는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 새삼스럽게 의문을 제기해 보게 만든 영화 '영어완전정복'
영주(이나영)는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9급공무원이다. 여기서 '9급공무원'은 아주 중요하다.9급공무원이기 때문에 할수없이 상사에게 떠밀려 영어 학원을 다녀야 했었고, 학원에서 운명과 같은 남자 문수를 만났기 때문이고 또한 그의 어머니는 영주가'공무원'이라는 것만으로 색시감으로 점찍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속에서 잠깐 전생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생의 영주는 명성황후다. 우아한 왕비복장을 하고서 안경을 쓴채로 두손을 들어 자신이 누구임을 만방에 알리는(?)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장면이 한방에 나를 쓰러뜨렸다. 짐짓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더니 '나는 조선의 9급 공무원이다'라는데 웃음이 터질 밖에...
이나영의 연기또한 명품이었다. 어리버리한 동사무소 직원에다 푼수끼 다분한 여자를 연기한 이나영의 새로운 면모가 신선했다. 누군 그녀의 진면목을 살릴 영화가 이다지도 없더냐고 통탄을 했지만 이쁜 그녀가 커다란 안경을 쓰고 촌스러운 복장에 웃기는 헤어스타일로 시종 웃음을 선사하는 모습도 나름대로 그녀만이 만들어 낼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겠는가 생각이 들었다.
동사무소에 찾아온 외국인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것에 충격을 받은 동장이 급기야는 소주병을 돌려서 영어공부할 사람을 뽑는다. 자신은 절대로 뽑힐리 없다는 생각으로 우걱우걱 상추에 삼겹살 싸서 먹다가 얼떨결에 소주병이 자신을 향한것을 본 영주. 그야말로 어떨결에 학원에 등록을 하는데 아뿔사, 그곳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될줄이야.. 영화는 중간중간 적절한 애니매이션 방식을 도입해서 영화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영어학원에서의 헤프닝은 한바탕 좌중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여기에 문수와 그의 어머니의 가슴아픈 사연까지 더해져 영화는 가슴찡한 감동까지 덤으로 안겨주었다. 문수의 어머니의 사연이란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문수여동생(빅토리아)를 입양을 보내야 했고, 엄마를 찾는다는 그녀의 신문광고를 보고는 결국 딸을 만나게 되는데 어릴때 입양된 딸은 우리말 한마디를 못한다. 그래서 어머니 표현에 의하면 치마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문수를 시켜 영어를 배우게 했는데 문수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어공부는 뒷전이고 영어학원 강사'캐서린'에게 넋이 나가 있다.
영어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이들이 나름대로 또 재밌다. 상사의 눈치가 보이는 기업의 중간간부는 단어는 돼지만 말이 안되어서 학원에 나왔고, 외국에 아이를 보내놓고 오랫만에 만나는 마나님은 아이와 영어로 대화하기 위해 학원에 나왔고, 영어학원만 무려 스무곳 넘게 다닌 대학생은 유학가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 중이다. 이 각각의 캐릭터중 어느하나도 뒤쳐진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의 연기가 돋보였고 또 누구보다 영어강사 역활의 외국인배우 역시도 대단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톡톡 튀는 그녀의 역활이 영화의 묘미를 살렸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영주와 문수의 '조형기식 영어발음'에선 배꼽이 빠질지도 모르니 배꼽관리는 필수!!
영주의 진심을 알아준 문수는 결국 영주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생전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결코 사랑을 받아주지 않더라는 자조를 하고 살아온 영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가장 아름다운 프로포즈를 받는다. 그것도 지하철 안에서 그것도 빨간구두를 신겨주며 무릎을 꿇은 남자한테서. 그것은 이미 틀렸다고 쓸쓸하게 돌아서 맨발로 지하철 역사에 놓은 의자에 앉아 누가 보든 말든 엉엉 울어 버린 후였으니 그 행복감을 무엇에 비유할수 있었을까? 그 장면을 보고나니 주책맞게 나도갑자기 프로포즈를 받고 싶었다. 이왕 버린몸(?) 이 어디가서 그세월을 다시 낚을수 있으랴만, 나도 잠시 영화속 여주인공이 되어 멋진 프로포즈를 받는다면... 하는 상상을 누가 말릴수 있으리.. 영화가 끝나고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한 남편에게 떼를 써보았다. '진하게 키스해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