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리 가는 길, 완숙교 아래 핀 들꽃단지*******************
다시 풍경 앞에 선다. 푸르다.
짙푸른 녹음이 빽빽한 산은 더이상 틈을 불허하는듯 보였다. 여린 연둣빛에서 조금씩 짙은 초록으로 오기까지 숲은 여러번 성장의 고통을 겪었으리라.. 숨막힐듯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 태양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싱싱하게 빛나는 유월의 숲!!
이제 '여름향기'를 품어내는 유월의 숲은 녹음을 완성하고 저리도 당당하게 서있다. 나는 눈이 부셨다. 여러번 눈을 씀벅이며 새삼스럽게 지난 봄의 연둣빛 산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다, 지난날이다 이젠 이리도 늠름하게 서서 여름을 불러 올 것이라 짙푸른 잎새를 한들거리는 숲을 차창 밖으로 감상하는 중이다.
온통 초록으로만 치장한 산 , 그 가장자리마다 푸른듯, 연한 잎들이 살랑인다. 잎새도 아닌것이 꽃도 아닌것이 이상하여 들여다보다, 그것이 '밤꽃'인줄 알았다. 아, 벌써 밤꽃 필 무렵이구나... 벌떼들이 날아들어 꽃가루 위에서 뒹굴다 가면 저리 연하게 대롱이는 꽃잎마다 밤알들이 탱글 탱글 열리는 날도 머지 않을 것이다.
비릿한 밤꽃향기가 버스 안으로 흘러 든다. 한낮의 햇볕냄새랑 섞인 비릿한 밤꽃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산등이성이는 끊어질듯 이어지고 다시 한번 같은 풍경을 반복한다.
숲은 이제 초록빛세상,, 가끔씩 보이는 밤꽃 말고는 초록색 이외의 색깔들은 들어갈 틈이 없다. 내 눈에 싱싱한 초록빛세상을 가득 담는 일이 행복하다. 이렇게 줄곧 유월의 숲을 들여다 보면 얼마쯤은 내 눈빛도 초록으로 싱싱해질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만 보고, 한군데만 응시하며 단편적인 면만 보아온 근시안인 내 눈에 오늘 만큼은 초록으로 물든 너른 세상을 한껏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언젠가 그런말을 들었다. 요즈음 아이들이 안경을 많이 쓰는 이유는 텔레비젼이나 컴퓨터가 시력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기 보다 산이나 하늘등 먼곳을 바라보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듯한 유월의 숲을 보니 어느 정도 그말에 공감이 간다.
숲이 멀어졌다 가까워지면서 들녘에 아무렇게나 자란 풀밭 틈새로 하얀 개망초 행렬도 보인다. 풀이 자란곳 어디든, 흙이 있는곳이면 어디든 왕성한 생명력으로 자라는 개망초 꽃이 한창이었다. 6월에서 8월까지 꽃을 볼수 있는 노란 애기똥풀 사이로 토끼풀의 하얀꽃도 눈부시다. 길가에서 뜨락이 보이는 집엔 벌써 노란 금잔화가 피어 있다.
구리가는 길, 완숙교 아래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다리 바로 아래 작은 야생화 단지에 꽃들이 곱다. 누가 가꾸어 놓았을까? 양귀비, 데이지... 보라색과 분홍색이 조화롭게 펼쳐진다.
배꽃을 만난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새 열매가 열렸는지 부지런한 농부는 열매마다에 하얀 종이를 씌워 두었다. 가지런한 초록잎새 사이로 하얀고깔을 쓴 배나무들이 귀엽다.
줄곧 일직선으로 달려오던 차가 모퉁이를 돌았다. 차가 도는 방향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반대쪽으로 향하다가 문득 하얀꽃밭을 만났다. 처음엔 개망초꽃 인가 싶었다. 하지만 개망초 보다 꽃이 작아서 다시 메밀꽃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직 메밀꽃이 피려면 일렀으므로 그것은 메밀꽃도 아닐 것이었다..
그 이름을 알수 없는 작은 들꽃은 모두 같은 모양으로 한밭가득 피어나 있었던 것이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신 하얀꽃으로 일렁이던 풍경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야트막한 산이 펼쳐지고 그 아래 폐허가 된 농가가 있었다. 예전 그 농가에서 살던 사람이 가꾸던 밭이 이젠 묵정밭이 되었고 꽃씨 하나가 날아와 꽃을 피우고 꽃씨를 날렸으리라... 그 꽃씨들은 더 맹렬한 속도로 꽃을 피우고 또 피워 오늘의 그 풍경을 완성했을 것이다. 제법 너른 묵정밭 가득 작고 하얀꽃을 피운 꽃밭에 평화로움이 넘실거렸다.
이 뜻밖의 평화로움이 깃든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가슴이 뜨거워 지는 것 같다. 하얀 들꽃밭위로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셀수 없을만큼 많은 나비들이었다. 어쩌면 '이세상의 모든 나비들이 이곳에 몰려온것은 아닐까 싶었다. 내가 한번에 본 가장 많은 나비들이 거기서 군무를 추고 있었던 것이다. 신비롭게도 그 나비들은 묵정밭에 핀 하얀꽃을 닮은 흰나비들이었다. 다른색을 가진 나비들만 빼고 하얀나비들만 그 밭으로 초대된것이었을까 싶은...
돌아서 생각해 보니 꿈을 꾼것 같은 장면이었다. 국도 한가운데, 길가에 차들이 싱싱 달리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아파트를 짓느라 시끄로운데 그곳은 평화로움만 가득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잖아 그곳도 파헤쳐 지리라.. 폐허가 된 집과 그 앞의 묵정밭도 어쩌면 다 갈아 엎어져 그곳에 야트막한 산을 가로막는 아파트가 들어서게 될지도 모르지.
아쉬워 다시 한번 돌아다 보았다. 햇볓아래 하얗게 펼쳐진 꽃밭 가득 여전히 나비들이 풍경하나를 완성하고 있었다. 나는 하얀꽃이 핀 풍경을 가슴에 담는다.
집에 도착해 화단에 핀 올들어 처음으로 피어난 접시꽃을 만났다. 진홍빛 진한 접시꽃이 세송이 피어있었다. 초록빛 잎새 사이로 진홍빛이 곱다. 그리고...누구였을까? 페트병을 분홍색으로 칠하고 가운데를 잘라낸 속에 흙을 채워 토마토를 기르고 있던 이는... 글쎄 그 토마토가 손톱만한 방울토마토를 키워 내고 있는걸 보았다. 이 눈물겨운 자연의 생명력 앞에 문득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다. 작지만 강한힘, 여리지만 꺽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모두 '내마음의 풍경'속으로 들어온 하루였다. 내마음의 속의 풍경으로 하여 올 여름을 잘 날수가 있을것 같은 느낌이다. 여름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