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479

필름 가지신분~~


BY 빨강머리앤 2004-04-29

우리집 사진기는 삼성캐논 자동카메라다. 이젠 낡아서 어쩔땐 제기능을 깜빡 하고 마는 오래된 카메라다. 이 카메라는 우리집에 온 두번째 카메라로, 첫번째 것은 강원도 치악산 계곡에서 여름휴가 중에 잃어 버린후 마련한 것이다.

카메라에 대한 전문적 지식같은걸 배울 염도 없었고, 그저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을 추억으로 남기고자 무조건 셔터를 누르곤 했었다. 그것도 아이들이 어렸을때 일이 되어 버렸다. 최근엔 아이들 모습이 예뻐 즉석에서 셔터를 누르는 일이 없어져 버렸다.

사진 찍는 일이 없어졌다는건 그만큼 아이들과 내가 함께 한 시간이 줄어 들고 있다는 증거 이리라.. 아이들은 정신과 신체가 자라는 만큼 자신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하는 중이고 나는 내 나름대로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는것 같다. 그 멀어짐의 공간적 거리만큼 아이들을 바라보는 횟수는 줄어들고, 사진도 덜 찍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작정을 하고 한달에 한두번 여행이나 나들이를 할라치면 카메라를 챙기고 본다. 이제는 아이들 표정이 예뻐서라기 보다 풍경이 예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다. 아이들도 예전처럼, 나 찍어 주세요'하면서 폼을 재는 일도 드물어 졌다. 생각해 보니 안타까운 일이다. 되돌릴수 없을까? 예전처럼. 이쁜풍경 앞에서 손가락 두개를 올려 '브이'자를 그려 보이며 살짝 윙크하던 모습을 찰칵, 사진기에 담던 그날로..

그땐, 그러지 말라는데도 사진을 찍을라 치면 윙크를 해대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두해전 섬진강가로 여행을 갔을적 사진속 아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윙크하는 모습이다. 사월이 막시작되고 있었던 아름다운 섬진강가, 강변과 맞닿아 있던 푸른숲 그리고 강가의 풀밭을 뛰어다니던 아기염소등, 배경은 다 다른데 아이들의 표정은 늘상 윙크하던 모습이었다.

또 다른포즈도 취해 보라는데 가만 있다가도 사진기를 들이대면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올리고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이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패랭이 꽃들이 보라색융단을 깔아놓은듯한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찍은 사진속 아이들은 언제나 손가락 두개를 들어 '브이'자를 하고 있다.

자동카메라는 너무 잘나오지도 너무 잘 안나오지도 않은 사진을 뱉어냈었다. 처음엔 필름을 잘못 집어넣어서 사진을 몽땅 버리던 일도 있었고, 필름이 없는것도 모르고 사진을 찍었다고 좋아했다가 사진한장 없는 여행을 하기도 했었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그런대로 풍경을 찍던 날들은 참 행복했었다. 가끔은 여행지에서 멋진 렌즈를 장착한 전문가용 사진기를 든 이를 만나면 주눅이 들고는 했었다. 상대적으로 내 자동카메라가 초라해 보여서.... 하지만 크게 부럽지마는 않았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요, 그저 자연이 좋아 여행길에 오르고 그 여행길에서 주워 들은 이야기 속에 추억 한자락 심어 놓을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가끔 문제가 되는 일은 필름 때문에 생기곤 했다. 지난달 산수유축제를 다녀오던 날도 필름을 미리 못 챙기고 길을 나섰다가 낭패를 볼 뻔 했었으니... 여행을 가기전에 미리 필름을 챙긴다는걸 깜빡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일요일 아침 일찍이라 동네가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우리는 그곳에 가면 필름 살만한데가 있겠지 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양평으로 향했었다.  산수유동네에 도착하고 보니 변변한 수퍼 하나가 없었다. 

그래도 어딘가 에서 필름을 살수 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걷다 보니 행사장에 와 있었다. 행사도우미에게 필름을 어디서 살수 있는지 물었다. 도우미 말인즉,'여기는 수퍼가 없는데요'였다. 아뿔싸,,  낭패구나 싶어 돌아서는데 도우미 아줌마 왈,"  내년엔 꼭 준비해 둘께요..'... 지금 당장은 어쩌란 말인지.. 그냥 산수유 구경만 하다 가자. 하고 마음을 정해 놓았는데 산속에 집들사이에 노란꽃망울을 열고 활짝 피어있는 산수유를 보자 사진에 담고 싶다는 욕심이 동했다. 개울가에서 송어잡이에 열중하는 남정네들도 찍어두면 재밌을것 같고, 그 옆에서 송어한마리 잡아올리라고 열심히 응원하는 사람들의 재밌는 표정도 찍어두면 추억이 될것 같은데..

논둑에 엎드려 나물캐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왜 그리도 정겹던지, 노란구름처럼 둥실, 커다란 산수유꽃 나무 두그루가 초록빛 보리밭가에 핀 모습을 두고 사진작가들이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정말 어떻게든 필름을 구하고야 말겠다는 각오까지 다지게 되었다.

주변을 탐색해 보았다. 필름을 가질만한이 어디 없을까? . 저앞에 상의든 하의든 검은색 한가지씩을 입은 젊은이들이 포착되었다. 산수유꽃이 피었고, 그아래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모양이었다. 각자 카메라를 든걸 보니 저들중 필름의 여분을 갖고 있는 이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남편은 말리는데 아줌마 뱃장 여기서 써먹어 보자 싶어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기념사진을 찍던 그 사람들을 향해 '혹시 필름 가지신분 있으신가요?'

물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뒤통수를 치는듯 했다.. '우리는 디지털 카메란데요?' 그렇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에 젖어 있는 아줌마의 낡은 사고는 이미 자동카메라를 제치고 디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걸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디카가 유행처럼 번질때만도 아직은 아니겠지? 싶었다. 난 갑자기 할말을 잃고 말았는데, 일행중 한여자분이 무안한 내 마음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가방을 뒤지더니 필름을 하나 꺼내놓는다. '여기 안쓴 필름 하나 있네요'...

굳이 받지 않겠다는 필름 값을 시세에 맞게 계산해 주고 돌아서는데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횡재한 기분도 들었다. 날은 좋아 산수유꽃은 더욱 노랗구나, 노란산수유꽃을 배경으로 이 멋진 봄날을 기억해 두자 싶어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득의만만.. 이럴때 쓰는 말이아닐까 싶었다. 시대유감, 이역시 이럴때 쓰는 말이겠다 싶었다.

자동카메라에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필름은 사실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존재이긴 하다. 필름을 잘 보관해야 하고 현상하기 까지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또 사진이 어떻게 찍혔는지 미리 알아볼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써온 것에 대한 애착으로 정이 들어버린 우리집 자동카메라는 어느덧 가족과도 같은 느낌의 존재였다.

이젠 디카시대라 한다. 산수유축제때의 불상사(?)도 있고 해서 안그래도 낡은 카메라 교체시기가 지났다 싶어 과감하게 디카를 장만했다. 어제 택배로 우리집에 온 디카. 아이들을 불러 세우고 오랫만에 사진을 맘껏 찍었다. 수정과 삭제가 가능해서 여간 편리한게 아니다. 아직 디카 기능의 10분의 1도 못 익혔고, 기계치에 가까운 내가 얼마나 잘 디카를 이용할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디지털 카메라가 생겼으므로 이젠 '필름 가지신분~~'하고 낯선 이를 붙잡고 물어 보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 이 허전함 같은것은 무엇인지... 나는 어쩐지 낯선이를 붙잡고 '혹시, 필름 가지신거 있으세요?'하고 묻고 싶어질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