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장에 들러 후리지아꽃 한묶음을 샀습니다. 노란 후리지아는 사탕향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사탕과 같은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후리지아를 진한 초록색 화병에 꽂아 두고 바라봅니다. 후리지아의 노랑색과 화병의 진초록색의 조화가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날이 따뜻해서 인지 어제 꽃을 사올때만 해도 입을 꼭 다물고 있던 꽃들이 하룻만에 벙싯 봉오리를 벌리고 웃고 있습니다. 저 헤설픈 웃음은 그래도 귀엽습니다. 노란꽃잎이 말린듯 밖을 향해 가지런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도, 그 안에 노란수술을 감추어둔 모습도 후리지아가 풍기는 사탕향내를 닮은듯 합니다.
후리지아 한다발이 방안 가득 사탕향내를 풍기면서 바삐 움직이는 내 눈길을 이끕니다. '나를 보아 주세요'그렇게 애교를 떠는 듯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벙글 거리듯 노란 웃음을 흘리는 후리지아를 바라보다, 사탕냄새와 같은 달콤한 꽃향기를 맡다가 문득 외로운 느낌에 젖습니다.
후리지아를 좋아했던 한 친구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삼년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친구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결혼 하기 전, 풋사랑을 앓던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가 좋아했던 그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이었지요. 그 사람은 우리 모두가 좋아했던 고교시절 생물선생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생님과 제자의 사랑도 없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때 우리에겐 선생님이란 존재는 아득히 멀리 계신 분이었고 감히 가까이 다가갈수도 없는 그런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분이었기에 선생님과의 사랑은 가당치 않은 감정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때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좋아했던 생물선생님은 노총각 선생님. 우리들이 좋아한 생물선생님에 대한 사랑은 그저 하나의 우상이라 불리우는 그런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좋은 감정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손한번 흔들어 주면 그것으로 만족했던 그저 선생님의 작은 손짓만으로 충족될수 있었던 단순한 감정 그 이상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습니다. 선생님을 진짜로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우리들 앞에선 그냥 선생님이 좋다고 했고, 진짜 자신의 마음을 다 얘기해 주진 않았습니다. 그저 선생님을 멀리서 라도 뵈면 얼굴이 붉어 졌고, 어떤날은 일부러 선생님이 지나갈 만한 길목을 지키다가 선생님 얼굴을 한번더 보고는 했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선생님을 짝사랑 하는것 같다고 고백을 했을 때도 우리들은 그러다 말겠지 했었지요. 그런 우리에게 더 깊은 속내를 말하지 못하던 그 친구는 가슴앓이를 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창백하던 얼굴이 핼쓱해지고 늘 입가에 짓곤 하던 미소도 거두었습니다. 그때가 아마도 선생님께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입소문이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때였던것 같습니다. 친구의 가슴앓이를 눈치채고는 우리들은 그 친구에게 해주는 말이라곤 고작, 너 그거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이야... 였습니다. 그러니 잊어. 선생님과 우리가 어떻게 맺어질수가 있겠니? 네가 이룰수 없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야. 하고 진정으로 그애 마음을 이해하는 말대신에 우린 객관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가슴앓이는 쉽사리 가라 앉질 않았지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생님께 다가가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선생님도 그 친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 선생님은 그 친구를 제자 그 이상으로 대하진 않았지요. 그냥 다른 아이들보다 약간만 더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한 이 친구는 남몰래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 가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이면 혼자 사는 선생님댁에 들러 청소를 해주고 밥을 해놓고는 했습니다. 그런 얘기들을 그 당시에 들었다면 적극적으로 말렸을 것을 그 친구는 우리들 몰래 선생님댁을 다녀오곤 했으니 우린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요. 제 딴에는 선생님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며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선생님과의 사랑이 맺어 지리라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요.
그 친구가 그렇게 선생님댁에 들러 청소도 하고 밥도 해주곤 하던 그런 주말에 그 친구는 후리지아꽃을 한다발 사들고 가곤 했다했습니다. 제가 직접 청소를 끝낸 선생님의 방에 노란후리지아꽃을 꽂고 나오면 그렇게 흐뭇할수가 없었다고 했어요. 친구의 마음을 대신하여 후리지아가 노란빛으로 사탕향기로 선생님께 다가가 주길 친구는 원했다고요.
그래서 그 친구는 후리지아 꽃을 사랑했다 했습니다. 선생님인듯, 사랑인듯 후리지아 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 얘길 나중에 선생님이 다른여인과 결혼을 했단 소식을 듣고난 후에 친구가 털어놓았습니다. 친구의 사랑이 안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슬프지 마는 않았습니다. 그 친구가 사랑하여 했던 모든 행동들이 다 이해가 되었고, 또 그 행동들 하나 하나가 다 예뻤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지러진 선생님의 방을 정리하고 선생님이 벗어놓은 옷을 빨아 말리고 깨끗이 정리한 방안에 가져온 노란후리지아를 꽂는 친구의 손길이 참 아름답게 그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친구는 나중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아들도 낳았고 칠년동안을 행복하게 살다, 또 칠년을 병상에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탕향기나는 노란 후리지아같은 사랑이야기를 남기고 바다를 앞으로 만나고 산을 뒤로 하고는 혼자 외롭게 누워 있습니다.
후리지아 향기가 코끝을 맴돌다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이 사탕맛 같은 후리지아 향기는 추억과 우정과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향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