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곳도 정들면 고향이 될것이지만, 그 낯선곳에서 봄을 맞는 심정엔 아직도 이물감이 남아있다.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것도 아닌데 자꾸만 지난해까지도 봄이 생장하는 것들속을 함께 했던 내 놀던 옛동산, 우장산(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소재)이 자꾸 떠오르곤 한다.그 산은 특별히 아름답거나 눈에 띄게 화려한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점이었을 것이다.눈에 띄게 이렇다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갖출건 다 갖춘 평범한 마을산이 그곳에 있을 때부터 정들어 지금도 그리움으로 기억되는까닭은.
인고의 계절, 겨울을 보낸 산들만이 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역시도 봄을 기다린다. 그것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느끼는 자연의 섭리다.
봄을 느끼고 싶어 삼월초에 우장산에 들어서면 때늦은 서설이 쌓여 길을 막고는 했었다. 응달에 쌓인 눈위에 쌀포대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곤 했었다.누군가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쌀포대 눈썰매를 탔으리라.. 어쩌면 어린아들을 태워 자신이 했던 그대로 눈썰매를 태워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참 따뜻해 지곤 했고, 남편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아이들을 쌀포대에 앉히고 썰매를 끌어주곤 했었다. 완만한 곡선을 따라 비탈진 산길을 아이들은 기뻐 와아 소리를 지르며 미끌어져 내려갔었다.
그길에 눈이 녹으면 젊은 부부는 아직 젖먹이인 아이를 보행기에 태우고 산길을 올랐고 다 자란 아이들은 엄마아빠 손을 잡고 씩씩하게 산길을 걸었다. 그 길 양옆엔 어디서 날아왔는지 민들레가 노랗게 꽃을 피웠고, 보란듯이 제비꽃들이 하나둘 벙싯 거렸는데 노랑과 보라빛의 조화가 참으로 예뻤다. 작은키에 작은꽃들을 피운 제비꽃은 수줍은듯 고개를 수그리고 꽃샘추위를 몰고 오는 바람에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진달래가 피는 시기도 그때 즈음이었다. 토양이 산성화가 진행될수록 진달래가 많아 진다더니 그 산에 진달래꽃이 참 많이도 피어났었다. 나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진달래꽃잎을 먹어보라 건네주었다. 씁쓰름 하다고 퇴퇴 뱉는 모습들이 예뻐 사진을 찍었두었는데 지금 들여다 보니 새삼스럽다. 진달래가 산속을 연분홍 빛깔로 물들일 때즈음, 산아래, 길양쪽엔 개나리가 노랗게 무리져 피어나곤 했었다. 특히, 우장산축구장 뒷편 언덕엔 온통 노란물감을 엎어 놓은듯 개나리가 피어나 장관을 연출했다. 그 사이로 고향에 대한 추억을 찾아 아낙네들이 쑥을 뜯고는 했었다. 양지바른 개나리밭가엔 쑥과 냉이가 제법 많이 돋아나 있어 나도 한번은 아이들과 점심을 싸들고 쑥을 뜯으러 갔던 곳이기도 하다.
바람이 잦아들고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면 우장산 입구쪽 화단에 조성해 놓은 철쭉들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무리져 피어나는 철쭉꽃 행렬이 아름다웠다. 연분홍, 진분홍, 주홍빛, 하얀색에 자주색까지... 갖가지 빛깔로 물든 철쭉꽃이 피어나면 근처 원두막에 동네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기 시작했고 우장산은 비로소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몇년째 그 길에서 어묵이며 커피를 파시며 인사를 건네는 아주머니와 친구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으례히 산을 한바퀴 돌아나올때마다 어묵파는 아주머니 한테로 달려가곤 했다. 항상 곱게 화장을 하고 시간이 날때면 책을 펼쳐들곤 하던 멋쟁이 아주머니 안부가 궁금하다.
진달래는 참꽃이고 철쭉은 개꽃이라 그랬다. '참'과 '개'는 반댓말이다. 어쨌거나 진달래는 진달래 대로 철쭉은 철쭉대로 아름다운 우장산길이었다.
그렇게 화려한 봄꽃들의 행렬속에 다소곳이 향기로 부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매화꽃이었다. 매화꽃 향기는 밤이라야 더욱 진하고 그윽하다. 푸르스름한 밤, 달이 뜨고 어느 봄날 저녁 그길을 걸었던 날.. 하얗게 매화꽃이 날리며 향기를 전해 주었다. 선경이 따로 없었다. 그 아래를 거니는 동안 매화꽃향기에 취하고 달빛에 비친 매화꽃 하얀색감에 빠져 들었다.
저 나름대로 봄꽃들이 가진 장점들이 있겠으나 봄밤에 달빛아래 하얗게 피어난 매화꽃핀 그 길이 가장 아름답게 기억에 남는다.
이젠 여름을 부르는 바람이 서해바다를 통해 파도처럼 넘실거리면 봄날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꽃 아카시아가 피기 시작했다.아카시아는 향기로 먼저 날렸다. 멀리까지, 내 사는 아파트 까지 날아오곤 했었다. 바람결에 실려온 아카시아 향기를 따라 산을 오르면 벌써 아카시아는 하얀꽃비를 뿌리며 한송이 두송이 흩날리고 있었다. 꽃비가 떨어진 자리가 햐얗게 쌓일정도로 아카시아는 끊임없이 향기와 함께 꽃송이를 날렸다. 그것은 아쉽게도 짧은 시간동안 누릴수 있는 축복이었고, 떨어진 꽃송이가 아쉬워 아이들은 바닥에 쌓인 아카시아 꽃을 한웅큼씩 움켜쥐고는 바람속으로 후후, 꽃잎을 날려 보내곤 했다.
날이 더워지면 산은 저혼자 녹음을 완성하는 시간을 원했다. 입구에서 머지 않은 곳에 한그루의 나무는 유난히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었다. 단단히 나무줄기가 아니라면 불안하게 보일정도로 가지가 넓게 펴지며 자라서 그것들의 가지는 땅에 닿을듯 했고 자신이 뻗은 가지들로 나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밤나무인듯한 그 나무는 그것 때문에 눈길을 끌었는데 그 주변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여름을 맞이하는 나무처럼 보였다. 온몸을 덮을듯한 가지와 그 가지 사이사이로 파란잎이 돋아나는 정경을 그려본다. 그 나무는 올해도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 하고 있을 테지.. 그립다. 파랗게 잎이 돋아나는 나무 주변으로 하얀꽃을 피운 조팝나무가 조화로웠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의 쉼터였던 내 놀던 옛동산의 모습이다.
산을 따라 걸었던 작은 길들이 손에 잡힐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참나무 군락이 아름드리 잎새를 틔운 여름날엔 그 숲에 들어서면 저녁인듯 캄캄했고, 그것들을 감싸안을듯 소나무가 무성했던 길도 생각난다. 싱싱하고도 진한 녹색의 소나무숲 아래서 찍으면 사진이 참 잘나왔었다. 그 향기가 오롯하게 전해지는것도 같다.
생각해 보니, 그리 크지 않은 우장산에 참 많은 봄꽃들이 피었다 지고 계절을 불러 들였던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 산에서 만들어낸 추억들이 그 봄꽃만큼이나 많았던 것도 같다.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그리운 산, 금강산도 아니고 설악산도 아닌, 우장산이 그리운 봄날이다.